COLUMN
경영 칼럼
할일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러 일이 한꺼번에 몰릴 때 발생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뭘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유튜브만 보고 있어요….”
며칠 전 지인을 만났다. 원고 마감이 다가오는데 회사 일도 겹치고, 발표 준비까지 밀려 있다며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은 속으로 찔렸다. 필자 역시 한두 시간 전에 책상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많다는 건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시간을 가치 있게 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러 일이 ‘한꺼번에 몰릴 때’ 발생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심리학에서는 ‘실행 마비(Analysis Paralysis)’라고 부른다.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우리의 뇌는 판단을 미루고, 미루는 사이 불안감은 커지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겉으로는 ‘게으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인지 과부하’ 상태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심리 실험이 하나 있다. 컬럼비아대 쉬나 아이엔거(Sheena Iyengar) 교수가 진행한 ‘잼 실험’이다. 한 슈퍼마켓에서 각각 24종류의 잼을 진열한 테이블과 6종류만 진열한 테이블을 설치하고 고객들의 행동을 비교했다. 실험 결과, 선택지가 많았던 쪽이 오히려 실제 구매율은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결정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한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해야 할 일’에 짓눌릴 때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뇌가 동시에 여러 항목의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잼을 고를까’ 하는 상황과 똑같은 인지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부터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게 된다.
이럴 때 필자가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하다. 그냥 그 일들을 종이에 써보는 것이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할 일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일은 머릿속 바깥, 즉 현실의 영역으로 내려온다. 그 종이는 생각 정리 노트이자 행동 계획서가 된다. 이때 중요한 건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고서 작성’이라고 간단하게 적으면 안 된다. ‘보고서 초안 작성 - 30분’, ‘자료 요청 메일 - 5분’처럼 세분화하고 예상 시간을 함께 적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막연한 부담이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작업 목록으로 변하게 된다.
그 다음엔 각 작업의 순서를 정한다. 흔히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쉬우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메일 한 통 쓰기, 책상 정리하기, 파일 분류하기 같은 일을 먼저 해내면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얻는다. 이 성취감이 다음 행동을 위한 연료가 된다. 시험 문제를 풀 때도 쉬운 문제부터 손대야 하듯이 업무도 마찬가지다. 하나씩 지우는 그 경험이 뇌에 확신을 심어주고 다음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 준다.
오프라 윈프리도 이 전략을 애용한다고 한다. 그녀는 하루를 시작할 때 복잡한 업무나 중요한 미팅 준비보다 5분 안에 끝낼 수 있는 작은 일을 먼저 처리하면서 하루의 리듬을 만들어간다. 짧은 감사 메일을 보내거나, 스태프에게 간단한 피드백을 전달하는 식이다. ‘일단 손을 댄다’는 경험 자체가 이후의 집중력과 몰입감을 끌어올려 준다는 것이다. 필자는 ‘쉬운 일 두 개 + 중요한 일 하나’를 묶는 방식을 자주 쓴다. 그리고 그 사이에 10분쯤 되는 짧은 휴식 시간을 의도적으로 넣는다. 이렇게 하면 하루가 단위별로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렇게 해도 일의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중요-긴급 매트릭스’를 활용해 보자. 이 방법은 제34대 미국 대통령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실제로 사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전략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아래와 같이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중요하고 긴급한 일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핵심 업무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일 장기적 성과에 중요한 계획형 업무
긴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타인에게 위임 가능한 일
중요하지도 긴급하지도 않은 일 과감히 제거할 수 있는 일
아이젠하워는 “긴급한 일이 항상 중요한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일은 대체로 긴급하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이 네 가지 기준에 따라 전쟁 중에도 하루의 우선순위를 조율했고, 그 덕분에 수많은 중대한 결정을 놓치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다. 현재에도 이 매트릭스는 리더, 기획자, 자기계발 전문가들 사이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 도구를 활용해 나의 일을 한 번 그려보자. 지금 해야 할 일과 미뤄도 될 일이 명확히 구분될 것이다.
투정한다고 할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지도 않는다. 간단한 일부터 먼저 완료함으로써 천천히 워밍업하시기 바란다.
글 _ 유정식 / 진행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