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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HISTORY] 삼국시대 철물점은 도심에 위치

 

삼국시대 철물점은 도심에 위치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로부터 듣는 백제 신라 고구려 공구제작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산하기관인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한반도의 고대 철 생산기술을 조사 연구하는 기관이다. 본격적인 철기시대로의 진입은 무기와 농기구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이는 곧 생산성의 혁명을 의미한다. 삼국시대 한국 철 생산기술을 규명해 나가고 있는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공구인의 모습을 알아보자.

 

대장간, 《단원 풍속도첩》

 

나라가 직접 생산했던 삼국시대 철 


한국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대장간이 곧 철물점이자 공구상이었다. 마을마다 대장간에서 낫과 호미를 만들고 각종 철물, 공구를 제작해 판매했다. 그렇다면 신라, 백제, 고구려의 공구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한지선 학예연구사는 고대 제철기술 관련 국내의 손꼽히는 전문가다. 그로부터 삼국시대 공구상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삼국시대의 공구상, 대장간은 지금으로 치자면 도심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철물의 재료인 철은 철광석 산지 옆이나 연료가 되는 나무가 많은 곳에서 생산이 이루어졌어요. 삼국시대는 국가가 직접 철을 생산했습니다. 대량의 철은 대량의 무기로 사용 될 가능성이 높고 또 대량생산을 위해 국가가 통제했던 것이죠. 삼국시대의 경우 철광석에서 낫이나 도끼와 같은 공구가 되기까지 2단계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파악 되는데요. 철광석에서 철을 뽑는 것을 제련작업이라고 하는데 그런 공정이 우선 1단계였고요.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한 철을 대장간에서 가져가 두드려 필요한 공구를 만들었을 겁니다. 그것이 2단계죠. 특히 대도시 유적에는 쇠를 두드려 물건을 만드는 단야 공방의 흔적이 있는데 칼 뿐만이 아니라 호미, 낫과 같은 공구를 제작했을 것으로 유추됩니다.”

 

충주 칠금동 유적의 노 발굴조사 현장


삼국시대의 ‘철’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자 전략물자였다. 그렇기에 국가가 생산을 통제했으며 이후 고려시대에도 기술자 집단 마을을 관리하면서 철을 제작했다. 반면 조선시대에 오면 점차적으로 철 생산이 민영으로 넘어가게 된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의 제철실험 모습

 

삼국시대 나무꾼에게 도끼는 전재산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철은 귀한 금속이었다. 지금은 흔한 가마솥도 삼국시대에는 재산목록 1호였다. 가난한 나무꾼이 연못에 도끼를 물에 빠뜨리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동화 속 이야기도 실상 도끼 한 자루가 집안의 전재산이라 눈물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긴 칼은 부유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의 무덤 속에서 발견된다. 

 


“도끼나 모루, 망치, 긴 칼처럼 철이 많이 들어가는 유물은 발견되는 일이 드뭅니다. 왜냐하면 철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특히 고대에는 귀한 금속으로 여겨져 다시 녹여서 재사용해왔기 때문이죠. 취락단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 중, 주방용 칼은 과도 크기에 불과 합니다. 큰 칼은 귀족용, 군사용으로 사용되었을 거고요. 큰 칼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밀집 취락지역은 손칼이 주로 발견됩니다. 공구 같은 경우는 낫과 도끼가 발굴되는데요. 쟁기날과 같은 삽날도 발견 됩니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철은 그 존재 자체로 화폐의 가치를 지녔을 겁니다. 지금처럼 화폐가 정식으로 유통되는 시대가 아니었고 물물교환 시대였으니까요. 삼국지 변진(弁辰, 변한과 진한)조 대목에는 ‘철이 유명하며 한(마한), 예(동예), 왜(일본)가 모두 갖다 쓴다.’고 서술한 것을 보아 당시 철정(鐵鋌), 덩이쇠를 중심으로 국제 무역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366년, 백제 근초고왕이 철제품을 만드는 원료인 철정 40매를 칠지도와 함께 왜에 보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도 있거든요. 충주의 탄금대토성에서도 철정이 5개 단위로 40매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처럼 철정은 사회의 생산성을 혁신적으로 올리는 공구나 무기를 만드는 재료이면서 동시에 화폐 역할도 했습니다.”

 


철도끼와 돌도끼는 성능에 큰 차이가 난다. 돌도끼로 100번 찍어야 넘어지는 나무도 철도끼를 몇 번 휘두르면 쓰러지고, 풀을 베는 것도 돌칼보다 철로 제작된 낫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이처럼 유용한 철은 삼국시대에는 사회의 변혁을 불러일으키는 신소재였고 제작하기 어려운 귀한 재료였다. 그래서 철은 화폐처럼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철, 1200도의 열과 습도 중요해


우리나라 철광석의 경우 철 함량이 대략 50%에 불과하다. 철광석 300kg을 녹여도 순수한 철은 150kg만 얻을 수 있다. 철광석보다 숯과 같은 연료는 더욱 많이 필요한데 철광석 300kg의 녹이려면 목탄 1톤이 요구된다.

 

제철 복원작업 이후 진행되는 노 해체 작업


“국립중원문화재 연구소가 직접 노를 만들어 11번 복원실험을 해본 결과 연료소모가 엄청났습니다. 철광석으로부터 철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대량의 숯과 철광석을 채울 대형 ‘노’를 만들어야 합니다. 노의 모습은 마치 도자기를 굽는 가마와 비슷하죠. 불을 지피고 바람을 불어 넣어 1200도 이상 열을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때 목탄을 엄청나게 사용해요. 옛날 사람들 기준에는 철광석보다 연료 확보가 우선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고대 제철소 유적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무가 많은 산으로 위치가 이동해 갑니다. 연료만이 아니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며 또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하죠. 작업 시기도 중요한데요. 장마철은 작업이 안 되고 습기가 높은 날도 작업이 잘 안됩니다. 겨울처럼 건조할 때 오히려 제철작업이 쉽죠. 그래서 철 생산 조업은 대부분 겨울에 했고 나머지 기간은 목탄을 만드는데 주력했을 겁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전문적인 직업군이 생길 수 밖에 없어요. 대량의 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전문가가 상당기간 긴 작업을 해야 합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전경


제철작업은 목탄과 철광석을 넣고 불길을 올린 후 다시 목탄과 철광석을 넣는 일의 반복이다. 풀무로 들어가는 바람의 힘으로 열이 1200도까지 올라가면 노의 바닥에는 철광석이 녹은 쇳물이 고이게 된다. 무게가 무거운 순수한 철은 바닥에 가라앉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불순물은 철 위에 위치하는 것.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철은 대장간에 보내져 칼, 낫, 삽, 도끼와 같은 다양한 공구로 제작 되었다.

 

삼국시대에 사용된 공구 유물들, 자료출처 : 복천박물관 2003 <<기술의 발견>>

 

충주 탄금대 토성에서 출토 된 철정 유물들

 

삼국시대 제철기술 충주에서 꽃피다


고대 삼국시대 제철기술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철기문화가 우리나라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이후 삼국시대 선조들은 독자적인 금속의 제련 및 주조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은 충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충주는 과거만 해도 풍부한 철광산지였어요. 지금은 철광석이 다 고갈되었지만 과거 철광석 광산이 15개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충주의 철 생산은 충주가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4세기 중후반에 경영된 탄금대토성의 내부와 칠금동 제철유적 발굴 결과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죠. 충주 탄금대 일대에서 생산 가공된 철은 한강 수로를 통해 유통되어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같은 한성백제 도성지역에서 각종 다양한 공구로 사용되었을 겁니다. 삼국시대에 충주와 같은 철산지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전략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백제의 철 생산능력, 농공구 생산, 무기 생산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었죠.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치열한 싸움은 고스란히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충주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 유적이 모두 발굴되죠. 오는 11월에는 12번째 제철기술 복원실험이 이루어집니다. 철물을 녹여 거푸집에 주입해 주조로 도끼를 제작하는 실험도 함께 할 예정입니다. 공구인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한지선 학예연구사


충주는 풍부한 철 산지이자 삼국통일의 꿈이 있었던 곳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역사를 책 속의 기록만이 아닌 오늘날의 유산이 되도록 다양한 제철유적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이곳에서는 삼국시대 선조들이 한 덩이의 철을 만들기 위해 무수히 노력한 시간과 다양한 공구를 제작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백제, 신라, 고구려 시대 공구인의 기록이자 역사로 남아있다. 

 

글·사진 _ 한상훈 / 자료제공 _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