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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과 예술의 공존 실험 첫무대 문래동을 가다


공장과 예술의 공존 실험 첫무대

문래동을 가다





서울시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를 빠져나와 문래동우체국 방향으로 얼마간 걷자 쇠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여기가 문래철재단지입니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강한 첫인상이었다.
문래동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여러 방직공장들이 입주했던 지역이다. 광복 이후 방직공장에서 사용되던 물레의 발음을 따 ‘문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60년대 정부가 주도한 경재개발계획과 산업구조의 변화로 철재산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철재상이 급속도로 증가했고 이런 흐름에 따라 방직공장 자리에 철재업체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80년대, 문래동은 우리나라 철재산업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시기 문래동 철재단지는 그야말로 활황이었다. 1300여 곳의 철공소는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주물, 용접, 소성, 재단 등 철재 가공의 모든 과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져 전국의 필요처로 출하되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규모의 철공소들이건만 물밀듯 몰려드는 주문에 가격이 만만찮은 호이스트 장착은 모든 업체의 기본이었다. 무거운 철재의 특성상 작게는 2.5톤 크게는 10톤을 들어 올리는 호이스트는 당시 문래동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귀를 찌르는 절단석의 마찰 소리, 날리는 은빛 먼지들, 튀어오르는 용접 불꽃에도 철재 가공 공장의 직원들은 지칠 줄 몰랐다.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진 조악한 공장 건물 안에서 그들은 호이스트가 힘을 다해 철재를 들어 올리듯, 국가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젊음을 불사르며 땀을 흘렸다.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문래동 철재단지는 꿈을 이룰 기회와 일자리를 주는 가나안이었다.
“그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어요. 돈 버는 전쟁. 요즘은? 그 때 작업량과 비교하면 십 분의 일이나 되려나.”
30년 넘게 문래동에서 터전을 닦은 태극정공 김영일 대표는 기름때 시커먼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철재단지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산업 구조도 IT를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98년 외환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우리나라의 철재산업은 하향의 길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철재 공장도 문래동을 떠나 시흥, 김포, 검단, 시화, 반월 등 수도권 밖으로 점차 빠져나갔다. 영광의 시대를 구가하던 문래동 철재단지의 공장 건물은 주변에 새로 들어서는 높고 세련된 건물과 녹색 공원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느새 기피 지역으로 낙인찍혔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에서 2009년에 발표한 <준공업지역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문래동 일대는 우선정비발전구역으로 선정됐다. 과거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던 문래철재단지가 지역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식어가던 문래동에 새 불꽃이 튀고 있다. 예술의 불꽃이다. 철공업이 하락세를 찍고 포화상태였던 공장들이 이주해 나가자 한껏 치솟았던 문래동의 임대료가 낮아졌고 1층에는 아직 공장이 들어서 있지만 2층 3층은 비어있는 건물들이 많아졌다. 이런 건물에 예술가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쇠락해버린 회색빛 문래 철재단지에 새로운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공연을 하는 예술인, 그림을 그리는 예술인 그 외 기획·이론 분야 등 수백 명의 작가와 예술인들이 유휴공간이 된 문래동 철재단지 건물 2·3층에 모여든지 10년이 되어간다. 이들은 전시,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를 펼치며 침체된 문래동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갔다. 골목골목을 돌 때마다 이들이 담장에 그린 벽화들이 빼꼼, 머리를 내밀고 시멘트 블록으로 조성된 공장의 담벼락에서도 밝은 색의 그림과 캐릭터들이 반가운 얼굴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 덕에 쇠락한 공장지대의 분위기가 산뜻하게 변화했다. 그렇게 달라진 분위기를 타고 세련된 식당과 카페, 와인바, 아트숍 등도 문래동 곳곳에 들어와 문을 열었다.
공장단지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예술의 조화. 그런 이질감에서 피어난 독특한 향기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최근 입소문을 탄 문래동은 주말이면 고급 카메라를 든 출사족(야외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촬영 장소나 혹은 젊은 연인들의 특별한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키치(Kitch)적인 분위기라고나 할까? 낡고 오래된 철공소 골목에서 피어나는 예술꽃의 향기. 문래동은 이곳만의 독특한 향기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지금 문래동은 ‘문래머시닝밸리’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독일의 우파파브리크, 중국의 다산쯔 798 예술구처럼 예술과 공업단지가 조화를 이룬 도시를 꿈꾸는 것이다.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문래동 철재 장인들의 근육과 신선한 분위기를 만든 예술인들의 리듬, 그 둘이 물레에서 꼬아지는 실처럼 하나로 어우러져 문래머시닝밸리의 이름을 소리치고 있다.

글 ·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