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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저쇼크 우리업계의 위기와 기회
엔저쇼크 우리업계의 위기와 기회
일본은 유가 하락의 여파로 0%까지 떨어진 물가상승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반향은 컸다. 2012년 6월 기준 100엔당 1,500원대였던 원-엔 환율은 3년 만에 50% 가까이 하락한 800원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엔저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난리야
‘공포’, ‘위협’, ‘쇼크’등과의 말과 함께 쓰일 정도로 엔저는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수출시장은 지속적인 엔저 여파로 휘청거리고 있
다. 지난 4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중일 3국의 상장기업 경영성과를 비교분석한 결과 한국기업들이 성장성 측면에서 가장 뒤처진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기업은 2013년 11.5%, 2014년 4.7%로 비교적 양호한 성장을 달성했다. 반면 한국은 2013년 마이너스 2.6% 성장에 이어 지난해에는 1.4% 성장에 그쳤다. 중국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중간 수준이었다.
20년간 경기가 활성화되지 못했던 일본의 경제침체를 이겨내기 위해 일본 아베 총리가 시행한 ‘아베노믹스’가 가장 큰 이유다. 아베노믹스는 일명 ‘양적완화정책’이라고도 불리는데, 엔화의 양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경제악화를 완화하는 정책이라고 보면 된다. 즉, 통화량을 늘려서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경제를 희생시키는 방법이자,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그간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이었다.
엔저는 엔-달러 환율이 오르는 엔화 약세 현상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엔화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돼 국제시장에서 일제 상품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1달러 당 100엔에서 200엔으로 엔화 가치가 100% 내려갈 경우, 1달러에 팔던 물건도 반값인 0.5달러에 판매할 수 있다. 이 때 해외 구매자들은 일본 물건을 싸게 구매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일본 자국의 수출이 활발해진다. 반대로 1달러에 수입하던 물건은 엔화가치 100% 하락으로 2달러를 내야 되기 때문에 수입은 줄어들게 된다.
자동차·철강·기계·석유산업 직격탄 … 수입은 맑음, 수출은 흐림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다. 원-달러 환율은 큰 변동이 없고, 엔-달러 환율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한국제품 가격은 그대로지만 일본제품 가격은 꾸준히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기는 좋고, 해외수출은 불리하게 된다. 가격경쟁력이 낮아진 수출기업들이 생각보다 저조한 실적을 보인 일명 ‘어닝쇼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전력, 롯데쇼핑 등 일본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들은 채무를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엔저 때문에 울고 웃는 기업들이 많다. 삼익THK, 한국정밀기계, LG화학 등 일본에서 원료를 수입하는 기업들은 엔저가 호재다. 이를 미리 파악한 주식 투자자들이 몰려 기업 주가는 상승하고 있다. 실제로 예초기 등 소형엔진의 원재료를 일본에서 대부분 수입하고 있는 계양전기는 작년 1분기 매출액이 713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5%, 영업이익은 77.8% 늘었다. 화천기공 역시 동기 매출액 637억 원으로 전년 대비 18.5% 증가했다. 영업이익률도 5.8%에서 10.7%로 급증했다. 특히 삼익THK의 경우에는 외화 부채 중 엔화 비중이 100%를 차지하고 있어 엔저의 혜택이 더 클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반대로 엔터테인먼트사, 네이버 등 일본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악재다. 가격경쟁력에 밀리면서 일본에 진출한 기업들은 사업을 접고 있다. 백화점과 쇼핑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랜드는 일본 요코하마에 있던 남성복 브랜드 ‘스파오’ 매장을 철수하면서 일본 내 모든 사업을 접었다. 2006년 일본에 진출해 한 때 8개의 화장품 매장을 운영하고 있던 아모레퍼시픽도 작년 39억 원의 영업 손실 이후 일본 사업에서 손을 뗐다.
특히 일본과 경쟁하고 있는 수출시장은 더욱 위협적이다. 아베노믹스가 본격 시행된 2012년과 지난해 한국과 일본의 권역별 수출액을 비교한 결과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디스플레이 등의 품목에서 엔저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특히 자동차 업계의 위기감이 크다. 미국 등 우리나라 수출 주력시장의 가장 큰 경쟁자는 일본이다. 일본 자동차 제조 기업들이 엔저를 활용한 공격적인 가격정책을 펼치면서 현대, 기아차의 영업이익이 급감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토요타의 캠리가 현대자동차의 소나타보다 싸게 팔리는 가격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에서 현대차와 기아차 점유율은 3년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반면 일본 토요타와 닛산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닛산 점유율(2014년 8.4%)은 작년부터 현대, 기아차 점유율(2014년 7.9%)을 역전하기 시작했다.
철강과 석유화학 시장 또한 공급이 과잉되어 있어 일본과의 수출 경쟁이 치열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원-엔 환율이 100엔당 연평균 900원일 때 석유화학 수출은 작년보다 13.8%, 철강은 11.4%, 자동차는 7.6%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2013년 출하량 기준 세계 TV시장 4위였던 소니는 지난해 중국 TCL을 제치고 삼성전자, LG전자에 이어 3위로 한 단계 올라섰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중 하나인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다. 삼성은 “지금보다 원가 경쟁력을 15%가량 높여야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계·공구 구입 적기 … 엔저는 지속 전망
아직 엔저는 진행 중이다. 금융계에선 올해 말 엔-달러 환율은 120~125엔, 원-엔 환율은 850원선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같은 엔저 가속화는 향후 2~3년 이상 지속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만큼 대외의존도가 높고 일본과 주요 수출 품목이 겹치는 한국으로서는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자동차 등 한국 대표 수출품목까지 제3국 시장인 일본제품에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일본에게도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무리한 화폐발행은 수출업과 관광업 등 일본에 일시적 흑자를 주었지만 자연스레 채무는 증가하고 있으며 일본 내 물가도 상승하고 있다.
정작 아베노믹스가 우려스러운 것은 아베노믹스 자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무모한 형태로 이를 계속 추진해 일본 경제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 저하, 재정건정성 이슈 부각 등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을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이다. 이 경우에는 엔화 가치가 더 크게 떨어지면서 우리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커질 수 있다. 정부는 지나친 엔저에 우려를 표현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책은 없다.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한 엔화 하락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제 기계·공구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유가 하락, 미국 금리 인상, 디플레이션 우려, 국내 제조업 침체 등 국내외 경기 상황과 소비자 수요의 변화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원-엔 환율의 추가적인 하락폭은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안에 미국 금리 인상이 본격화되면 원화 가치도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한편 김진성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거시분석실장은 “아베노믹스로 인해 일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만, 경기 불황에서 탈출한다는 최종 목표는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며 “엔저를 유발할 수 있는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원-엔 환율에 따른 수출경쟁력 하락 우려는 제한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엔저에도 불구하고 과거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오랜 기간 유지했던 평균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엔-달러 환율이 110엔을 넘던 2005~07년에도 우리나라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두 자릿수를 기록한 바 있다. 과거에 비해 우리 수출제품의 비가격경쟁력이 향상되고 수출지역 및 품목 다변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 재작년 우리나라 수출이 사상최대의 경상수지 흑자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일본 기업들이 엔저로 낸 수익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면서 가격 경쟁력 뿐 아니라 품질 경쟁력까지 더욱 높이게 될 수 있다. 무역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 기업은 품질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수익성을 추구해야 한다”며 “중소기업도 생산성 향상과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