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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사랑과 양구사랑, 시인 신계전의 이야기.
3월 햇살은 연한 싹을 틔운다. 고이 잠들어있던 꽃잎은 자기 색으로 물이 든다. 새 잎은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간다. 봄의 끝자락이 닿는 양구. 이미 눈이 한 차례 내렸지만, 양구의 바람은 의외로 봄볕보다 따스했다. 강원도 양구는 한반도의 중앙에 폭 안겨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아담하고 청정한 곳, 코앞에 휴전선을 둔 최전방이자 두타연 비경과 박수근 미술관을 가진 요즘 핫한 관광지다. 이곳에 공구사랑이 만나보고 싶었던 여인이 있다. 신계전. 전국 장터를 떠돌며 공구 팔던 그는 삶을 응축해 글로 담아냈고, 운명처럼 시인으로 등단했다. 글은 세월의 바람을 한입 베어 물고 머금은 향기를 그대로 내뱉는 듯 깊이 있고 솔직하다. 첫 시집 ‘네가 우는 이 순간만은’부터 세 번째 시집 ‘시련의 햇살’까지 인생을 음미하는 시인 신계전(67)씨를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공구 팔 장터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4시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눈을 떴다. 깜깜한 탓에 밤참인지 조반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밥 한 술을 순식간에 삼켰다. 각지의 장날에 맞춰야 했기에 물건을 챙겨 일찍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가 먼 곳은 9시, 10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하게 되니까 무척 불안하고 바빠져요. 장터에 물건 팔 자리가 여의치 않아 상인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밀려나거나 아예 자리가 없을 수도 있거든요.”
장터에서 자리가 외곽으로 밀려나면 그 날은 공치는 날. 밥값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사가 괜찮게 되는 날은 하루 해가 금방 갔다. 하지만 손님이 없는 날은 왜 그리 해가 길던지.
공구와 함께 앞치마 제품을 전국에 도매로 판매했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부터였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 봉화가 고향인 박근익(74)씨와 결혼해 부산에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부산에서 모피공장을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고, 새로 시작한 의류가게도 형편이 어려워졌다. 결국 새로운 일을 위해 부부는 상경했다. 전국의 장날을 돌아다니며 공구며 모피 물건을 운반하며 팔기 시작했다. 1986년,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사실 장사는 순탄치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날씨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기상악화 때문에 물건을 제 때 공급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품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공구 자체에 문제가 있어 그런 일도 있었고 소비자의 까다로운 트집, 사용 중 실수와 파손을 판매자에게 덮어씌우는 잘못된 고의성도 있었고요. 자신이 왕이라고 믿는 소비자의 불량한 태도 때문이지요.”
차를 들이대 세우고 물건을 싣더니 돈은 안 내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기가 막혔다. 잊어버렸겠지 설마 일부러 그랬을까,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장날에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두어 번 기다리다 단념했다.
장사는 쉽지 않았고 전국을 누비는 일에 몸은 고달팠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그 힘든 것쯤 거뜬히 참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게가 없는 떠돌이 장사라 해도 장날이면 만날 수 있는 단골손님이 있어 반가웠고, 샤워기 수리하다 물벼락을 맞기도 했지만 고쳐줘서 고맙다고 과일을 건네주던 인정 많은 고객들도 있었다. 가족과 끈끈한 정으로 뭉쳤던 그 때가 가끔은 그립다.
“지금도 공구, 앞치마만 보면 웃음이 나와요. 리어카부대라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옛날 장터가 좁잖아요. 그래서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거든요. 좁게 진열해서 이 골목, 저 골목 신나는 음악을 틀고 다녔는데 엄마, 아빠, 딸 셋이서 각자 소점포로 분가해서 삼거리, 사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싸인을 주고받고, 매상도 확인하며 즐겁게 장사했지요.”
어떤 공구가 잘 팔렸는지도 다 기억날 만큼 그 때가 생생하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전지가위, 전기톱, 전동드릴이, 강원도에서는 낫, 도끼, 호미, 장대톱 등 밭작물 재배나 가지치기용 제품, 접이식 휴대용 공구가 잘 팔렸다. 충청도, 경기도 쪽에서는 샤워기, 수도꼭지, 드라이버, 가정용 공구세트가 많이 나갔다고 한다.
몸이 고될 때, 삶이 힘들 때 떠올렸던 시는 헤르만 헤세의 ‘혼자’였다.
“희망과 용기, 인내와 끈기, 좌절과 단념 속에 강인한 버팀의 생명력을 암시하고 있지요.”
혼자
헤르만 헤세
지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도달점은 모두 다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지혜나
능력은 없다.
그는 글을 좋아했다. 초등학생의 어린나이에도 ‘글 참 잘 쓴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참가했던 이순신 장군 옥포대첩기념제 백일장에서는 장원을 받기도 했다. 바쁜 장터 안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장사할 때 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경험했기에 아픈 만큼 용기와 끈기도 생겼어요. 그 때마다 글을 썼던 기억이 새롭네요.”
주로 아침 일찍 또는 손님이 뜸한 점심시간에 생각을 메모했다. 한 자, 한 자 마음에 담아둔 말들이 흘러나왔다. 얽힌 실타래를 풀 듯 줄줄 써내려갔다. 전국을 다니며 경험한 그의 삶은 습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 글은 생각의 보금자리이자, 내일을 위한 버팀목이었다. 시집과 수필집을 많이 읽었다.
“윤동주의 ‘길’, 허영자의 ‘자수’, 이탄의 ‘줄풀기’를 좋아해 수시로 들여다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이에요. 시조시인 신순애 선생님의 ‘멍석딸기’도 좋아해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꽃시인이지요. 금강초롱같은 영롱한 명작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열린 시단의 꽃이라 생각합니다.”
글을 사랑한 그는 1991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후 1992년 첫 시집 ‘네가 우는 이 순간만은’, 1996년 ‘이 세상은’을 냈고, 2012년에는 양구에서 세 번째 시집 ‘시련의 햇살’을 출간했다. ‘한국현대인물사’ 편집기자 등 여러 잡지사에서 기자로도 활동했다.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노천명 문학상, 농촌문학상, 한맥 문학상 등을 줄줄이 수상했다. 작년 11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21회 서울창작가곡제’에서는 신 씨가 작사하고 김종덕 작곡가가 곡을 붙인 ‘여울새’라는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작년 12월에는 사단법인 세계문학협회와 월간 세계문학 주관으로 열린 한국세계문학상에서 ‘마천루’가 시 부문 본상의 영광을 얻었다.
마천루
신계전
우러를 수 없는
부끄러운 목숨들
구십도 침묵으로 꺾고
초원의 들판에
빛살무늬 세워
차가운 어둠 한 소큼
가슴 뚝배기로 끓일까
이 세상은
한 줄기 미소로 밝아오고
한 자루 촛불로 넉넉하고
한 마디 말 속에 녹아나고
한 송이 꽃으로 훈훈한 것
옥천(玉泉)처럼 솟아나는
너와 나의 가슴 맞대어
하늘 한 입 베어 물고
눈물 한 방울 썰어
세상이 가야 할 길
세상이 해야 할 일
바람숨 모아모아 소지를 올리리니
그가 남편과 함께 양구에 정착한 지는 6년째다. 육군 준위로 근무하는 아들 박병수(40)씨가 2010년 양구에 있는 육군 21사단 정비대대로 발령받으면서 함께 오게 됐다. 아들은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 살림을 꾸렸고, 신 씨 부부는 공기 좋고 평화로운 양구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남편 박 씨는 산을 다니며 약초 캐는 취미가 생겼다. 신 씨는 현재 글을 쓰면서 양구문화관광해설사와 양구군 팟캐스트 ‘청춘FM’ DJ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2년 한국문학신문이 주최한 제11회 기성문인문학상에서 수필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일이 계기가 돼 작년 한 해 동안 한국문학신문에 ‘신계전의 양구사랑’을 연재하기도 했다. 서천 명물, 시래기 덕장, DMZ, 두타연 등 글 한 줄, 한 줄에 양구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처음에는 최전방 지역이라 불안하기도 했는데 살다보니 좋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양구의 이미지가 맑고 푸른 것처럼 실생활도 맑고 푸르게 가꿀 수 있어 너무 좋아요.”
양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신계전 씨다. 워낙 지역 내외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어 그를 아는 사람도 많다. 그녀가 자주 찾는 음식점 사장은 신 씨의 팬이다. 신 씨의 글은 작은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읽어보고, 카페와 블로그에 글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기도 한다.
신 씨가 이곳에서 문화관광해설을 시작한 지는 2년이 넘었다. 양구문화관광해설사는 양구군청에 소속되어 관광객들을 안내해주는 자원봉사자로, 그는 최고 연장자지만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양구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표현하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양구를 전국에 알리고 싶은 그의 열정은 듣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두타연, 제4땅굴, 을지전망대, 선사박물관, 박수근 미술관 등 지역 관광지 설명과 더불어 농특산물, 맛집 소개까지 그가 하면 인기 만점이다. 따뜻한 봄, 여름에는 거의 매일 관광 일정이 잡혀 있을 정도다.
그는 ‘청춘FM’에서 방송DJ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년 12월 개국한 ‘청춘FM’은 양구 최초의 팟캐스트다. 방송동아리 ‘소통’의 회원 18명을 중심으로 양구읍사무소 2층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지역주민뿐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양구 소식을 전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코너를 통해 소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다. 신 씨는 여러 코너 중에서도 60-70년대를 살던 이들과 추억의 이야기와 음악을 공유하는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잡지사에 기고하면서 수필을 쓰고, 새로운 시집을 발간하기 위한 글도 틈틈이 쓰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읍사무소에서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 작은 도서관도 혼자서 운영하고 있다.
공구 팔던 장터에서 시인이 되었기에 인생에서 공구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공구는 제 인생의 수리공이지요. 막힌 곳을 뚫듯이 생각을 뚫고, 낡은 곳을 고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인생전동기라고 할까요.”
공구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삶에 공구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공구 덕분에 가계를 꾸려나가고, 글을 쓰고, 양구에 정착할 수 있었다. 지금도 공구상을 지날 때면 걸음을 잠시 멈춘다. 그 앞에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번 찬찬히 훑어보고는 다시 발을 뗀다. 장사의 힘든 과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든 만큼 성장했고, 생각도 깊어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된다. 인생을 음미하는 신계전 시인. 그녀의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성격만큼이나 앞으로의 글도 삶도 해피엔딩일 것 같다.
“희망과 내일을 노래하고 싶어요. 생동감 넘치는 삶을 조명하는 미래 지향 시인으로서요.”
글 _ 장여진 · 사진 _ 박성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