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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역사를 듣는다] 대한민국 공구산업 변천사



일광공구공업 김형태 대표에게 듣는
 
대한민국 공구산업 변천사
 
우리나라 공구산업은 70년대 산업화를 전후하여 반세기 만에 급속도로 형성, 발전해 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제조, 유통의 변화 양상 또한 다양한 국면을 맞았다. 전 일광공구 대표이사 김형태 대표는 고등학교 시절 공구업계에 입문해 우리나라 공구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일대에서 활약하며 공구산업의 전국적인 흐름을 고스란히 지켜본 인물이다. 국가발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아왔던 공구산업의 거대한 흐름과 명암의 교차, 새로운 거상의 탄생 등 업계 변천사를 김형태 대표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기록했다.





60~70년대 공구 수입업체 오파상 등장
 
공구업의 출발은 60~70년대 열악한 국내 기간산업을 배경으로 한다. 공산품 제조에 필요한 근간이 바로 공구산업이기 때문이다. 김형태 대표는 1960년대말 고등학생 때 ‘금성무역’이라는 오파상에서 일하며 공구업계에 입문했다.
“당시 환율이 1불에 300원 전후였어요. 지금에 비하면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죠. 국내공산품 수출은 적은 반면 산업계의 수요는 더욱 크고 다양해지면서 수입품에 대부분의존하고 있었어요. 일본산이 가장 비중이 컸어요.”때문에 이 시기 외국 수입품을 국내에 알선해주는 ‘오파상(offer)이 생겼는데, 금성무역이 그 대표 업체다. 금성무역은 지금은 돌아하신 故김성태 회장이 창립한 회사로, 일본오사카의 대영물산 한국지점 전무로 있던 경험을 살려 65년도 창립했다.
일본산 수입이 많아지자 대일무역 역조 현상이 생겼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수출금액의 몇 퍼센트를 정해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임포트쿼터블 제도를 시행했다. 오파상들은 이 권리를 정부로부터 사서 각종 공구를 수입할 수 있었다. 당시는 이런 오파상도 얼마 없었다. 대표 오파상인 금성무역, 한사무역을 주축으로 국내에서 생산되지않는 수공구, 전동공구, 볼반, 밀링공구, 측정공구 등을 수입대행하여 전국 대표 공구상에게 공급했다. 당시 국내 대표 공구유통상은 청계천 삼광공구사, 일왕상회, 종일기공사, 세원기공사, 경화상사, 태평양공구, 삼창기계 등이 있다.


1970년 전후 제조업 현황
 
70년대 전후해 공구 제조업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수는 매우 적었다. 1970년전후 국내 기계공구 제조업체는 순풍공업사, 한국특수공구, 덕천산업, 한국야금, 일광공구, 신생정밀, 신생공업사, 동일공업 등 10여개 뿐이었는데 이들이 초기 제조업의 근간이 되었다.
70년대를 지나오면서 공구제조업체는 서서히 늘어났지만 여전히 국내 수요에 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입품은 계속 등장했고 정부 규제도 계속 이어졌다. 김형태 대표는 30년이 지난 현재 이런 초창기 제조업체가 사라진 곳이 대부분이라 가장 안타깝다고 한다.
“서울은 초창기 순풍, 한국, 덕천, 한국야금, 일광까지 다섯 개 업체가 있었어요. 이 중에 현재까지 원래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은 한국야금과 일광공구 둘 뿐이죠. 이들 초창기 이 업이 오랜 역사를 갖고 유지됐으면 좋았을 걸. 너무나 안타까워요.”




1970년대 중상들의 활약
 
수입품 또는 국내 생산품의 전국 유통에는 중상(中商) 일명 ‘나까마’라고 불리는 유통상인의 활약이 컸다. 이 시기 가장 큰 수익을 올린 것도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까마들은 큰 도시를 오가며 국내 제조사와 오파상에서 수입해온 물건을 전국에 유통시키는 역할을 했다. 수입해 오면 서로 달라고 할 정도로 국내 수요가 높았다 .
“서울에서 수입되는 각종 공구(절삭공구, 작업공구, 전동공구, 측정공구)는 중상을 통해서 전국으로 매도되었어요. 반대로 대구에서 생산되는 톱날, 선반척 등은 대구 중상을 통해서 서울, 부산으로 이동했죠. 당시 거상이었던 익영상사, 상명상사, 삼오기공사 등의 수입이 상당했어요.”
당대를 누볐던 거상들은 현재 거의 다 고인이 되고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이많지 않아 공구 역사의 명암이 엇갈린다.
미군부대에서 불법 유통되는 각종 수공구, 작업공구, 드릴 등을 유통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단속반의 눈을 피해 꽤나 밀거래가 이뤄졌으며 그로 인해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업체도 많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공구는 청계천 일부, 남대문 변두리 일대에서 공공연하게 유통

 
됐죠. 단속반이 그 일대를 엄청나게 돌았고,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경우도 많았죠.”우리나라 최초의 택시인 시발택시도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펴서 엔진을 달아 택시와 버스를 만든 것이다. 청계천은 도면만 있으면 헬리콥터도 만들고, 북성로는 탱크도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80~90년대 이후 공구유통업계의 변화
 
시대 변화와 흐름에 적응을 못해 자연도태돼 사라져간 업체도 많은 반면, 새로운 거상으로 부상한 업체도 상당하다. 특히 80~90년를 거치면서 공구유통업계에는 새로운강자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새로운 트렌드 반영, 외국기업의 유통구조 벤치마킹 등으로 발전한 유통업체도 많아요. 공구업 역사에서 크레텍책임, 케이비원. 동신툴피아이를 빼놓을 수 없죠. 크레텍책임 최영수 대표는 대구 인교동 등에서 작업공구를 주로 유통했고, 케이비원의 김정도 대표는 대구 북성로에서 절삭공구를 위주로 했다. 동신툴피아 김동현 대표는 서울에서 활약하면서 저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죠.”
이들 기업은 일취월장 성장하며 현재 자타공히 빅3로 일컫고 있다. 특히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사고로 장학 후원 또는 장학재단을 설립, 지역사회 기부, 성실한 납세자로 모범이 되는 등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업계를이끌어 가고 있다.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 적응 필수
 
40여 년간 공구업계의 진화 과정을 돌이켜 본 김 대표는 사라져간 기업에 대한 안타까움도 크지만 여타 제조업의 발전 수준이 세계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큰 희망을보고 있다.
“70년대와 오늘을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절삭공구 분야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상당히 괄목할 만해요. 또 측정공구를 제외한 전 산업 분야가 품질면에서 감히 세계적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부할 만하죠.”
사회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점점 그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김 대표는 공구업계 또한 이런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고객 니즈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부한다. 또 앞으로를 이끌어갈 2세대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공구업계 1세대는 헝그리 정신으로 사업을 일구어왔어요. 땀 흘려 일한 고생의 가치를 아는 세대죠. 그러나 2세대는 다릅니다. 부모의 혜택 아래 비교적 순탄한 과정을 걷고 있다고 봐요. 1세대와 똑같이 밥 굶을 필요는 없지만 제대로 기업을 이끌려면 제일밑바닥, 필드에서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공구제조업과 유통업이 앞으로 지난 40여년을 훨씬 뛰어넘는 업적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진심이 담겨 있다.

 


글, 사진 _ 배선희
자료제공 _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원, 청계천문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