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통일인더스트리 이영수·이순주
공구와 차의 그윽한 밀월관계
전라북도 익산시 평화동 익산 전통차 문화원. 소담스런 건물의 고풍스런 나무문을 가볍게 당겨 열자 그윽한 차향(茶香)과 함께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들려온다. 전통차 문화원의 원장 이순주 씨가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다. 현을 어루만지는 그녀 앞, 마치 옛집의 툇마루를 연상케 하는 목재 테이블 위에는 흙빛 자사호(중국 이싱 지방에서 만들어진 찻주전자)가 놓여 있고, 그 자사호로부터 흘러내려진 차가 찻잔에 담겨 있다. 풍겨오는 차향의 발원지다.
“황차예요. 불발효차인 녹차와는 다른 발효된 차랍니다. 향도 좋지만 발효 과정에서 카테킨 성분이 줄어들어 맛도 참 부드러워요.”
가야금 소리처럼 은은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이 원장. 한 문장만으로도 차에 대한 박식함이 드러나는 그녀는 전통차 문화원의 원장이라는 명함 외에 또 하나, 의외의 직함을 갖고 있다. 바로 통일인더스트리라는 공구상의 사모라는 직함이다. 그녀가 처음 공구상 일을 시작한 것은 남편 이영수 대표가 통일인더스트리의 문을 연 1992년. 두 부부의 나이 스물 넷 시절이다.
‘차’라는 것. 가볍게 한 잔 목구멍으로 삼켜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것. 하지만 이순주 원장의 인생에는 깊은 향을 남기는 존재다. 그녀 인생의 절반이 담긴 공구상 일에도 차향은 그윽하게 배어 있다.
“차를 처음 소개받은 건 30대 초반의 일이에요. 하루 종일 공구상에 있으면서 취미 삼아 한 잔씩 우려 마셨죠. 그러면서 우리 가게를 찾아 준 손님들에게도 차를 한 잔씩 대접하기 시작했어요.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매장 2층에 다실을 두고 차를 대접했는데 우리 가게에 왔다가 2층으로 올라가 차를 마시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고 그러시는 것 있죠.”
쇳덩어리 공구를 찾아 공구상을 방문한 이들이 접한 쇠 냄새가 아닌 차향은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들어 줬다.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과 ‘고객-판매상’의 관계가 아닌, 마치 친척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원장. 차가 둘 사이의 매개체가 되어 준 것이다.
차를 대접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대접하는 것
다도(茶道)라는 말이 있다. 차를 마시는 방식, 다법을 일컫는 말이다. 원장은 다도라는 말보다 다례(茶禮)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 하는 규칙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가 하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에서다.
“차를 마시는 형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요. 차를 마시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공구상에서 차를 마시고 대접할 때 방석을 깔고 얌전히 앉아서 마실 수는 없잖아요. 서서 마시죠. 대신 저는 이 마음으로 차를 마시고 대접했어요. ‘많은 공구상 중에 우리 가게를 찾아 줬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차를 마시는 잠깐의 순간이라도 편안했으면 좋겠고, 편안한 마음에 기뻤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요.”
차는 공구상을 찾는 고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원장 자신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줬다. 공구상 문을 연 초기, 사람 대하는 일에 전문가나 다름없던 남편과는 달리 장사에 미숙했던 그녀. 계산서를 기다리는 손님을 한참이나 서 있게 만드는 그녀의 모습이 남편은 답답하게만 보였다.
“제가 숫자개념도 부족하고 또 인문계 출신이고 하다 보니까 빨리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손님 앞에 두고 답을 못 하니까 남편 목소리가 높아지는 거 있죠. 서러워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날이 많았어요. 술을 마실 수도 없으니까 매일 차를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다시 내려오곤 했죠. 엄청 울었어요 진짜. 남편이 나한테 화낸다고 생각해서. 하하. 그때 차는 저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 줬어요.”
지란지교 : 사람 사이에 전해지는 마음
찻잎을 덖다. 덖다라는 표현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표현이다. 하지만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할 단어다.
‘물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볶아 타지 않을 정도로 익히는 것.’ 우리나라 전통차는 대개 덖음 방식으로 제다(製茶)된다. 익산 전통차 문화원에서도 덖음을 통해 차를 만들어낸다.
“공구도 종류가 많지만 차도 만만치 않아요. 수천가지 종류의 차가 있는 걸요. 제가 만든 제다 교재에 실린 차만 해도 90가지가 넘어요.”
문화원에는 찻잎과 꽃잎을 넣고 섭씨 350~400℃에서 덖을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 말고도 여러 가지 시설이 갖춰져 있다. 운치있게 앉아 차를 즐길 수 있는 다실과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교육실은 물론이다. 이런 전통차 문화원을 이순주 원장에게 선물한 사람은 바로 남편 이영수 대표다.
“여기 인화동 평화동 거리가 예전에는 익산시의 메인 거리였어요. 지금은 낙후됐지만요. 사 뒀던 비어 있던 가게를 아내에게 선물한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니까 자기가 배운 걸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의미를 두는 것 같더라고요. 그 모습이 참 좋아서 아내에게 선물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2008년, 그렇게 문을 연 문화원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다례교육은 물론 가야금과 놀자, 한자와 놀자, 논어와 놀자 등의 프로그램이 일 년 내내 준비되어 있다. 최근에는 익산 시내 장애우 시설에서 방문해 차 체험을 즐기고 돌아가기도 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잖아요. 특히 후천적 장애를 가진 분들은 굉장히 힘들어 하세요. 그분들과 함께 차도 우리고 명상도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차를 우리면서 물소리 음악소리를 듣고 잠시 쉬어간다는 느낌으로요. 너무들 좋아하시는 거 있죠. 다들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마음속에 있어요. 못하는 것뿐이죠.”
차 박사 아내와 찻그릇 박사 남편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부부에게 같은 취미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일까. 차를 좋아하는 아내 덕에 남편 이영수 대표도 차에 푹 빠지게 됐다. 근처 대학교의 예문화다도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아내를 따라, 남편도 석사 과정을 이수하며 다례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익혔다. 그러고는 아내와는 다른 방향으로 한 발짝을 더 디뎠다. 다기(茶器)에 대한 관심이다.
“남편이 진짜 엄청 많이 사다 줬어요. 저기 장식장에 진열된 자사호나 찻잔 같은 것도 전부 남편이 해외에서 사다 준 거예요. 교육장에는 더 많아요. 공구상 2층 다실에도 잔뜩이에요.”
그런데 진열된 다기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찻그릇에 대한 문외한이 봄에도 다기들로부터 고고한 품격이 느껴진다. 이순주 원장은 남편의 다기를 보는 안목이 무척 높다고 평한다. 대표는 어디에서 그런 안목을 기른 것일까?
“제가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거든요. 특히 중국에 많이 가요. 갈 때마다 오래된 고재(앤틱)들 파는 곳에 가서 시간을 들여 둘러봅니다. 그런 곳에서 많이 구경하고 또 공부도 하면서 눈이 키워진 거죠. 중국 말고도 스리랑카도 차 문화가 굉장히 발달한 곳이에요. 한번은 차 시장에 갔는데 여덟 시간을 돌아다녀도 끝이 안 보이더라고요. 거기서 사 온 자사호가 있어요. 일반 자사호가 아니고 고재죠. 우리나라 차 행사에 그 자사호를 들고 갔더니 사람들이 다들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작은 찻잔에서 배우는 비움과 내려놓음
커다란 선물과 또 그 선물을 채우는 귀중한 선물을 해 준 남편에게 원장은 작년 4월, 보답으로 색다른 선물을 한 가지 했다. 바로 남편 이영수의 이름과 그녀 이순주의 이름이 저자명으로 적힌 책 <차를 사랑하는 공구점 부부>의 출간이다.
“여기 있는 이 테이블도 비싼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이런 걸 사는 데 돈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남편은 뭔가 문화원에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 오는 거예요. 그런 게 너무 고마워서 남편에게 선물하려고 책을 썼어요. 남들은 그러더라고요 무슨 남편에게 책을 써 주냐고. 30년도 넘게 같이 살았는데 질리지도 않냐고요. 하하. 사실 여기 전통차 문화원 한다고 해서 돈 버는 건 솔직히 하나도 없거든요. 오히려 쓰면 썼지. 그런데도 남편이 많은 시간을 들여가면서 찾아 선물해 주니까 정말 고맙더라고요.”
맨 처음 이순주 원장이 생각한 책의 제목은 <사람의 힘 공구의 힘>이었다. 부부가 아직 어린 나이에 공구상 문을 열고 힘겹게 힘겹게 버텼던 시간의 이야기가 담긴 책. 그녀는 20대 30대 들에게 ‘우리도 없이 시작했으니 너희도 힘들더라도 한 번 해 봐라’하는 의도로 책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하 생각하는 출판 의도와는 달라 많은 내용이 삭제되고 변경되었다. 차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 되고 남편과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이 출판되었다.
“출판사에서 그러더라고요, 공구 이야기만 쓰면 공구점 사람들이 대상 독자가 되는 건데 얼마나 팔리겠냐고요. 전체적인 시장을 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바꿨죠 뭐. 하하하.”
전통차 문화원을 운영하면서 이순주 원장이 얻는 가장 큰 것은 전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문화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라 말한다. 총 회원 수는 200여명. 문화원에서 배운 사람 중에는 초등학교에서 예정 강의를 하는 분도 있단다. 하지만 문화원 근처의 공구상을 운영하는 분들은 쉽사리 방문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말하는 그와 그녀였다.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오시라고 해도 아직 이런 쪽을 마음 편하게 생각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요. 또 같은 공구상을 운영하다 보니까 경쟁관계라고 생각을 하셔서 그런지 쉽게 마음을 못 여시더라고요. 저는 다 같이 이곳을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공구상 일을 해 봐서 일이 정말 바쁘다는 건 알고 있거든요. 그래도 쉬면서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뭐든지요.”
원장은 찻잔이 작은 이유가 그것이라 한다. 비우고 내려놓는다는 것. 나도 모르게 한 잔의 차를 비우고 내려놓는 과정. 바로 거기서 채움이 생기는 것이라 말하는 그녀였다.
글_이대훈·사진_박성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