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탐방
가슴 속 못다한 말 한마디
북성로 영광의 시기 7~80년대… 지나다니는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녀
대구시 중구 북성로. ‘북성로 공구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1950년대 미군의 군수물자용 공구를 유통하는 상인들이 모여 조성된 거리다. 7~8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 모든 공구가 북성로에 모인다고 할 만큼 호황을 누렸지만 달라지는 경제 구조와 시대의 흐름, 그리고 우리나라 산업의 기반을 크게 뒤흔들었던 90년대 후반 외환 위기와 세계 경제의 불황을 겪으며 북성로의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젊은 날 고향을 떠나 맨손으로 대구에 올라온 김대식 현전사 대표. 북성로에서 온갖 역경을 견뎌내고 지금도 그 자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 지난 30년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그 세월 동안 서로에게 말 못 하고 묻어두기만 했던 이야기는 없을까.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김대식 대표 부부와, 작년 11월에 결혼식을 올린 둘째 딸 부부가 북성로 인근 식당에서 자리를 펼쳤다.
아빠 “내가 북성로에 온 게 1982년이지 아마. 지금이 2016년이니까 벌써 35년쯤 됐구나. 이 자리를 안 뜨고 한자리에서 이렇게 오래 있었으니까 나는 여기가 고향같애. 전기 공사 업체에 다니다 북성로에 와서 이 업을 시작한 게 87년도였지. 비오는 날 전봇대에 올라갔다가 감전돼서 죽을 뻔 했던 이후에 여기 북성로에 전기 설비 공구 쪽으로 발을 들이게 된 거야.”
전기 공사 업체를 퇴사하고 아는 지인의 소개로 북성로 전기 설비 공구상에 들어간 김 대표는 한전에 다니던 무렵 취득했던 전기 관련 자격증 덕에 다른 직원들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자본과 전기 공사 기술,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이른 독립을 가능케 했다.
아빠 “여기 현전사를 차릴 때 네 엄마 도움이 컸다. 그 때 네 엄마가 금성, 지금은 LG지. 금성 대리점에서 경리로 근무하고 있었거든. 네 엄마 보려고 일부러 전기 재료나 마그넷트, 차단기 이런 걸 갖다 준다고 자주 갔었지. 그 때 ‘아, 이 여자랑 결혼하면 내가 독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촌에서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하니까 누가 좀 도와줘야 하잖아. 그런데 네 엄마는 경리를 보니까 물건에 대해서 다 알지, 가격 다 알지, 나는 전기 공사할 줄 알지 ‘아하,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만큼 마음에 들기고 하고.”
엄마 “나는 이사람 별로 안 좋았다. 만나긴 해도 결혼은 생각도 안 했었어. 그런데 네 아빠 처음 봤을 때 기억은 지금도 생생해. 금성 사무실에서 여드름을 짜고 있는데 거울로 보니까 키가 쪼맨한 사람 둘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거야. 그 때 거울에 비친 네 아빠 눈에서 끼가 좌르르 흐르는 게 보이더라고.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철렁- 하지 뭐니.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마 인연이라서 그랬나 봐.”
인연이라서 만났다는 두 사람은 1987년 결혼과 함께 북성로 한복판에 현전사를 차렸고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따른 경제 발전과 함께 가게도 더할 수 없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당시 북성로 일대는 중심 골목 뒷골목 할 것 없이 문만 열면 손님이 넘쳐났고 지나다니는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공구 판매의 열기가 뜨거웠다.
아빠 “그 때 벌이가 참 좋았지. 월급쟁이들 한 달에 8만원 10만원 월급 받을 때 나는 지갑에 100만원씩 넣고 다녔으니까. 벌이가 괜찮다 보니 집은 그냥 내버려 두고 밖에서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더라고. 개 두 마리 데리고 엽총 들고 사냥도 다니고, 커다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도 타고 하고싶은 건 그때 다 했지.”
돈 버는 재미에 가족은 뒷전… 북성로의 부작용으로 쌓인 가족간의 섭섭함
김 대표가 그렇게 집 밖에서 나름의 사회생활에 열심인 동안 아내 이손화는 집은 신경도 안 쓰는 남편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말한다. 게다가 경상도 상남자인 김 대표의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행동 때문에도 무척 힘들었다고.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친정이라고 할 가족이 없던 자신에게 만약 친정만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김 대표는 섭섭함으로만 남아 있다.
엄마 “당신은 좋았을지 몰라도 나는 당신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집안일은 다 나한테 맡겨 놓고 바깥일에만 신경 썼잖아. 집이든 애들이든 신경이나 썼어? 내가 당신 때문에 애들 엇나갈까봐 얼마나 엄하게 길렀는데. 우리 도연이도 시집가기 직전까지도 통금 시간 있었잖아.”
아빠 “그때는 내가 철이 없었지. 변명을 하자면 그게 북성로의 부작용이었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지 않나 싶어. 그때는 매일 그럴 줄 알고, 매일 장사가 그렇게 잘 될 줄 알고 그랬다. 우리 도연이 결혼시킬 때 그런 후회가 들더라고, 내가 조금만 더 철이 일찍 들어서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면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 키울 수 있었고 집사람한테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가족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항상 그런 생각이 내 마음 속에는 있어. 이 자리를 빌어서 당신하고 우리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구먼.”
북성로의 부작용으로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탓에 두 딸과 막둥이 아들 세 아이의 양육은 오로지 엄마인 손화씨의 몫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시대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아들을 딸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처가 식구들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첫째도 딸, 둘째도 딸을 낳았을 땐 그리 무심하기만 하던 남편이 셋째 아들을 낳았을 때 좋아하던 모습에 서운함을 느꼈던 엄마 손화씨도 삼남매를 기르다 보니 자신도 막내를 두 딸들보다 귀하게 키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랬던 자신의 모습에 딸들이 얼마나 섭섭해 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딸 “언제나 병주가 나나 언니보다 우선이었어 엄마는. 병주가 뭐 먹고싶다고만 하면 다음 날 상에는 그게 꼭 올라와 있고. 언니나 나는 그게 얼마나 섭섭했는데. 또 언제더라? 병주가 불량학생들한테 괴롭힘 당하니까 나한테 병주 따라다니면서 보디가드 하라고 하고. 아니, 아무리 누나라고 해도 쪼그만 여자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엄마 “그러게.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아들만 받들었는지 몰라. 얼마 전에는 옷장 정리하다가 너희가 어렸을 때 썼던 반성문을 봤다. 아마 너랑 병주랑 싸워서 썼던 것 같아. 그런데 읽어보니까 누가 잘못했는지 그건 중요하지도 않고 나는 무조건 병주 편에 서서 너를 야단쳤던 것 같더라. 너는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반성문 썼고. 그걸 보니까 ‘아, 내가 우리 딸들한테 좀 무심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엄마 걱정시키지 않고 다 착하게 커줘서 고맙다. 우리 가족 중에서 걱정됐던 사람은 요 아저씨 하나뿐이지 뭐.” (웃음)
너희가 고생을 아느냐 북성로의 황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집안에만 있던 아내 손화씨가 가게로 나갔던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였다.
그 열기가 영원할 것으로만 믿었던 북성로도 IMF를 피할 수 없었다. 가게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인 그 때, 월급 줄 돈이 없어 여럿 두고 있던 직원들을 다 내보낸 자리를 손화씨가 메꿨다. 그만큼이나 힘들 때였다.
아빠 “IMF가 딱 닥치니까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닌 거야. 거래처는 다 날아가 버리고 받은 어음은 다 부도수표가 돼 버리고…. 당시 여기 북성로 공구상의 80% 정도가 장사 내팽개치고 돈 살리려고 합의이혼 하고 외국으로 떠나버렸어. 그 때 외국으로 갔던 사람들이 요즘 나타나더라고. 나도 당시에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 수표 부도 내버리고 몇십억 챙겨서 집사람한테 챙겨 주고 합의이혼 하고 외국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 그 전에 화려하게 생활하던 거랑 비교하면 적응이 안 되니까.”
현전사를 운영하던 김대식 대표의 가족 말고도 북성로의 모든 공구상, 우리나라의 모든 공구상들도 그 당시의 힘든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어려움을 김 대표 부부와 그의 가족은 그래도 이겨 냈다. 어쩌면 그 힘든 시간이 지금처럼 아빠 엄마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하나로 단단히 모이게 한 계기가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위 “장인어른, 그거 아세요? 장모님이 장인어른 칭찬 엄청 많이 해요. 항상 멋있다고. 맨손으로 혼자 대구에 와서 이렇게 자리를 잡았다는 게 참 대단하시대요. 제가 봐도 아버님 진짜 멋있어요. 매장에서 찾아오는 손님들 대하는 거 보면 정말 넓은 인맥이 느껴진다니까요. 몇 번인가 도연이랑 장인어른이랑 셋이서 달성로 공구골목 걸었던 적이 있잖아요. 그러면서 지인분들과 인사도 하고 그럴 때마다 기분 참 좋더라고요.”
딸 “내가 봐도 아빠는 멋있을 때는 굉장히 멋있어. 남자답고. 엄마가 아빠한테 뭐라고 해도 나는 아빠가 좋아. 아빠가 하는 일도 좋고. 우리 신혼집 조명 공사는 아빠가 다 해 줬잖아. 지난번에는 오빠랑 나랑 잠깐 집에 불 켜놓고 아파트 밖으로 외출한 적이 있는데 들어오면서 보니까 우리 집 LED등이 제일 밝은 거 있지? 그때 참 뿌듯하고 아빠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괜히 들더라. 그런데 아빠도 우리 오빠 자랑 많이 해?”
아빠 “그러면 내가 칠푼이 되고. 그래도 우리 가게에는 아침마다 여섯 일곱 명이 모여서 모닝커피 한 잔씩 하잖아. 셔터 올리고 물건 꺼내서 다들 장사 준비 마치고는 우리 가게로 와서는 매일 아침마다 모닝커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거지 뭐. 전날 있었던 일, 앞으로 있을 일 그런 얘기하면서. 그럴 때, 아침에 맨정신으로 은근히 사위 자랑을 하지. 자랑할 만하니까.”
엄마가 정해 둔 통금시간에 남편과 데이트하던 때도 밤늦기 전 항상 집으로 돌아갔던 둘째 딸 도연씨. 그런 도연씨와의 데이트를 위해 남편 태훈씨는 2년 간 거의 매주 주말마다 회사가 있는 창원시에서 연인이 있는 대구까지 오고 가며 데이트가 끝날 무렵에는 언제나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단다. 태훈의 그런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2년 동안 봐 온 김대식 대표 부부는 나이 어린 딸을 시집보내도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 “자네를 보니까 정말 요즘 보기 드물게 책임감도 있고 성실하고 또 약속도 지킬 줄 아는 남자더라고. 그래서 이만 하면 됐지 않나 했어. 어렵게 결정한 거지 어떻게 보면. 우리 집안에 가장 큰 행사잖아. 삼남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하는 거니까. 나이가 차서 가는 건 아니지만 사위가 믿음이 가니까 보낸 거지.”
사위 “장인어른 장모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아직 어리기만 한 저에게 저보다 더 어린 아내를 보내주셨잖아요.”
부모의 삶과는 다른 자녀의 삶…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길
금지옥엽 품 안에서 25년 넘게 품어 온 딸을 사위에게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쓸쓸할까. 하지만 워낙 신뢰가 가는 사위라서 걱정은 없단다. 그래도 엄마 이손화는 가게를 보다 집으로 돌아와 싱크대에 밀려 있는 설거지 거리를 볼 때면, 엄마가 힘든 게 싫어 언제나 밀린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둘째 생각이 난다고 한다. 그렇게 착하기만 해서 오히려 걱정인 딸을 그토록이나 엄하게 키웠던 것이 지금은 후회도 된다고. 하지만 도연씨는 엄마의 엄한 가르침이 지금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 자신도 아이를 낳으면 엄마의 가르침을 따르겠다 말한다.
딸 “나도 엄마처럼 아이들 키우려고. 통금 시간도 정하고 외박도 절대 금지하고. 나는 그게 굉장히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거든. 왜냐면 어릴 때는 아직 사고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니까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거잖아. 아들이든 딸이든 웬만하면 통금 시간을 정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어릴 때는 통금이나 그런 게 좀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엄마한테 감사해.”
사위 “저는 아이를 어른에게 예의 바른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장인어른께서도 그런 걸 강조하시기도 하고, 저도 예전부터 자식을 낳는다면 그렇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거든요.”
결혼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아이 양육에 대한 생각이 단단히 잡혀 있는 딸 도연씨와 사위 태훈씨 부부. 그들에게 부모가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아빠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겠다’하는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 같아. 부모와 자식은 공구에 비유하자면 ‘버니어 캘리퍼스’같은 관계거든. 어미자와 새끼자로 측정하는 공구인데, 어미자와 새끼자가 제대로 맞지 않으면 원하는 걸 이뤄내기가 힘들어. 서로 떼려야 뗄 수도 없는 공구이기도 하고. 어미와 새끼가 잘 맞춰 나가야 하나의 제대로 된 공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고 화목한 가족도 만들어지는 거야. 너희도 그렇게 아이를 낳고 차근차근히 항상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인생은 잘 풀려 갈 거다.”
엄마 “내가 살아온 삶과 너희가 살아야 할 삶은 다른 거니까. 나는 우리 사위를 믿어. 굳이 우리 삶을 비출 필요도 없고 따를 필요도 없고 너희 나름대로 좋은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아빠는 닮지 말고.” (일동 웃음)
기획 _ 서상희 · 글 _ 이대훈 · 진행 _ 장여진 · 사진 _ 박율 · 장소제공 _ OWL가구카페(대구시 남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