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탐방
[공구와사람들] 국내 유일 프로레이싱팀 여성 정비사 정효정
남자만의 일이 있을까. 그녀는 여중, 여고를 나와 오히려 ‘여성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는다. 치마보다는 바지를 좋아하고, 성격도 털털하다. 무거운 물건도 자기가 들겠다고 나선다.
“저 되게 힘 세요. 무거운 거 잘 들고 다녀요.”
그녀가 속한 팀은 지노모터스. 이곳 팀장 박진호 씨(40)도 옆에서 한 마디 거든다.
“얘가 왜 여자에요. 완전 남자지.”
고운 외모와는 달리 손은 거칠고 힘이 있다.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남자 분들은 물건 들 때 하지 말라고, 저보고 비켜보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그들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아요. 일하러 왔는데 여자라고 무거운 거 피하면 얼마나 꼴 보기 싫겠어요.”
남자들도 못하는 일을 여자가 왜 못하나 싶어 도전했다. 물론 남자보다 체력적으로 무리는 갔다. 무거운 부품을 옮기는 건 힘들지만 요령만 터득하면 여자들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7년간 백화점 판매관리 일을 했다. 7시 반 출근에 평균 9시 퇴근. 행사나 잔업이 있을 때는 더 늦게까지 일을 했다. 진상 손님들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할인을 해달라고 떼를 부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자기가 누군지 아냐고, 윗사람한테 보고를 하겠다고 막 소리를 질렀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결국 점장에게 전화해 할인을 약간 받았어요. 그런데 왜 말이 바뀌느냐며 또 욕을 하시더라고요.”
손님이 갑이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손님을 말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 온 가족까지. 서러운 일이었다.
압구정에 위치한 한 백화점. 이곳에서 일할 때는 손님이 뜸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지루했다. 가끔 오는 손님도 물건을 살까 말까였다. 하루 종일 텅 빈 매장을 지키다보니 앞 매장 언니와 수다를 많이 떨게 됐다.
“그 때 진로에 대해 상담을 많이 했어요. 이 일 그만두고 뭘 하나 고민을 많이 했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요.”
일을 그만두고 다른 걸 배워보자 마음먹었다. 백화점을 나온다 해도 무얼 하든 먹고 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의류 제작은 어떨까. 재봉틀을 배워봤지만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옷은 그냥 사 입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토샵, 일러스트를 배워도 봤지만 잘 안 맞았다. 웨딩도 생각해봤지만 백화점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그 때 유일하게 관심이 가던 일이 있었다. 자동차 정비기술.
“백화점 판매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자동차 정비는 기술이 필요한 일이에요.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했죠. 나한테 잘 맞겠다 싶었어요.”
2012년, 34살의 나이에 한국오토모티브컬리지(HK) 자동차정비튜닝학과에 진학했다. 240여 명의 재학생 중 여자는 단 4명뿐이었다. 게다가 최고령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열정은 열 살 차이가 넘는 신입생들보다도 넘쳤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 하나로 들어왔으니까. 자동차 정비 기술을 이론과 실습을 통해 많이 배웠다. 학교에서는 자주 레이싱 현장으로 견학을 갔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에 소속된 레이싱팀인 ‘록타이트’에서 메인터넌스(유지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박진호씨를 만나게 됐다. 그가 얼마 뒤 본인의 이름을 건 정비업체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락해보니 일을 같이 해보자는 답변이 왔다. 그렇게 그녀는 작년 7월부터 함께 일을 시작했다.
새내기 정비사가 된 그녀는 아직은 보조역을 하고 있다. 경기장에서는 타이어 공기압, 온도를 재고 연습할 때 랩타임을 기록해 분석한다. 자동차 정비업계는 특유의 남성적 문화를 가지고 있어 소위 ‘텃세’도 많다.
“여기는 전동공구 잘 못쓰게 해요. 버릇 나빠진다고요. 직접 손으로 하는 스패너 같은 수공구들을 많이 쓰는 편이죠. 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보통 공구를 잡지도 못해요. 제가 공업사에서도 근무한 적이 한 달 있었거든요. 그 땐 초보자라 어깨너머로 보기만 했어요. 매일 옆에서 손전등만 비추고 있고. 사실 직접 실수해보면서 배우는 게 빠르죠(웃음).”
이론에서 배우는 것과 현장에서 배우는 것은 많이 달랐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정비의 일부분이었다. 이곳에서 직접 부품 하나, 공구 하나하나 만져가면서 몰랐던 것들을 하나, 하나 알아가니 보람도 있다.
“일이 재밌어요. 이제 수동기어를 제어하는 미션을 내려서 분해하고 조립하는 건 할 수 있어요. 여기서 많이 배웠죠.”
레이싱카는 일반 자동차와 구조가 달라 수리하는 게 더 재미있다.
“본넷을 열어보면 일반차들은 복잡한데 레이싱카는 그렇지 않아요. 수동기어, 엔진처럼 핵심 부품만 들어가고 에어컨 등 불필요한 옵션이 없어서 고장 난 부분은 빨리 보고 수리할 수 있어요.”
3~4월부터 11월까지는 매달 1회씩 레이싱 경기가 열린다. 대회가 가까워지면 분주하고, 밤을 새는 날도 많다. 차량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빨리 튜닝을 해 경기 전까지 달릴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놔야 한다. 스피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경기 중에 사고가 나면 큰 일. 문제가 생긴 부분은 빠른 시간 내에 교체해줘야 한다.
“경기장은 항상 긴장감이 필요해요. 긴장을 놓고 있으면 바로 욕을 먹어요. 모두가 차 하나에만 집중해요.”
경기 중에 암(arm)부품이 구부러진 적이 있었다. 자동차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비사들이 서킷에서 들어온 차에 집중했다. 5분 이내로 끝내야 한다.
“에어잭(차체를 들어 올리는 장치) 준비해! 경기 빨리 시작해야 돼.”
“임팩(전동 드라이버) 빨리 갖고 와!”
들리는 건 오로지 고함치는 소리와 공구가 땡강거리는 소리. 시간 내에 부품을 교체하진 못했지만 경기는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녀는 매번 이런 긴장감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정효정 씨. 앞으로 10년 뒤에는 뉴질랜드로 가는 게 목표다.
“마흔 중반에는 뉴질랜드에 가고 싶어요. 그곳은 정비사가 많이 부족하다고 들었어요. 경력을 쌓기 위해 지금 산업기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기름 때 묻은 정비복은 그녀만의 멋진 패션아이템. 명품가방 대신 공구를 손에 든 그녀의 모습에 다시 카메라를 들이댈 날을 기대해본다.
글 _ 장여진·사진 _ 박성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