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탐방
36년 신용경영 비법 공개 전주 전일공구볼트사 전중배 대표
학자금이 없어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다니던 대학교를 중퇴하고 공구 판매를 하기로 결심한 전 대표.
“그 때 당시 형이 공구상을 운영하고 있어서 나도 공구업을 한 번 시작해보기로 했지. 조그마한 5평짜리 구멍가게에서 장사를 했는디 말여. 공구 매입할 돈이 없다보니 가게 안에 물건이 거의 없었어. 있어보이게 그냥 빈 박스로다가 공간을 다 채워 넣고 잉. 그 외 전 재산은 오토바이 한 대가 전부였제.”
형편없는 가게, 텅 빈 박스를 채우기 위해선 없는 물건도 팔겠다는 의지와 가진 것 없는 자의 패기가 필요했다.
“안파는 물건이라도 어떤 물건이든지 다음날까지는 꼭 구해서 찾는 손님한테 갖다 줬지.”
손님이 원하는 공구 제품들은 가게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없는 물건을 주문받은 날에는 어떻게든 그 물건을 구입할 곳을 물어보고 찾아내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녔고, 겨우 받아낸 물건은 어떻게든지 손님에게 배달하려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세차게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그때는 차가 있어 뭐가 있어. 오로지 오토바이 하나뿐이었지. 손님한테 물건 갖다 나르려고 매일 그렇게 다녔으니 사고도 많이 나고 차 밑으로도 몇 번씩이나 들어가 죽을 뻔 했지. 자식들이 갓난쟁이일 때 오토바이에 태우고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적도 있다고. 큰일 날 뻔 했지. 어렸을 때 부모노릇을 많이 해야 되는디 어려운 상황에 애들한테 잘 못해 준 것이 지금 많이…”
힘들었던 옛 생각에 그와 옆에 있던 딸 상민 씨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진다. 현재 그녀는 전일공구의 부장으로서 아버지로부터 경영을 배우며 전일공구의 전반적인 운영을 도맡고 있다.
소금이든 주방세제든 원하면 다 사다줘
“주문이 들어오면 사장님이 책임을 지고 준비해요. 납품할 게 있으면 잠을 안 자고서라도. 우린 3일씩 날을 새기도 했어요.”
신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어떤 물건이든 배달하겠다는 약속은 철저히 지켰다. 염화칼슘이 필요하다면 사다 주고, 쓰레받기를 가져다 달라 해도 군소리 없이 납품해줬다. 공구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도 불가능은 없었다.
“발주서만 주면 모두 다 납품해주니 우리 집이랑 거래하는 사람들은 편하지. 한 자리에서 다 거래할 수 있응께. 소금이 필요하다면 사다주고 물통이 필요해도 다 사다줘. 공구랑 상관이 없어보여도 알고 보면 업계 사람들한테 다 필요한 것들이여.”
주방용 세제를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세제를 사용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이해가 되더란다.
“다 현장에서 쓰이는 거여. 배관 공사가 끝나면 세제 탄 물을 스프레이 용기에 넣어서 배관 표면에 뿌려. 그럼 기계에 에어를 넣어서 테스트 할 때 공기 새는 곳은 거품이 나올 거 아녀. 그런 용도로 쓰니까 사다줘야 하는 거여. 생각보다 그런 물건들이 많아. 공구상에 있지 않아야 할 물건들이.”
물건을 어떻게 사는 지 물어봤다.
“그런 건 마트 가서 사다줘야지 어떻게 해. 그럼 마진은 없지. 2천 원에 사서 2천 원에 팔더라도 일단 구해놔. 사람들이 계속 찾으니께. 단돈 얼마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물건이 있어야 일을 하지 아녀. 내일 써야 되면 내일까지 꼭 해드려야 되는 걸.”
그는 돈보다 중요한 게 신용이자, 고객의 일이라 생각했다. 어떤 물건이든 다음날이면 바로 배달해줬던 오랜 세월을 거치니 고객들과의 믿음이 쌓이게 됐다. 결국 전일공구는 특별한 홍보 없이도 저절로 믿을 수 있는 공구상, 거래하고 싶은 공구상이라고 소문이 난 거다.
일 잘한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다. 몽골 고속도로 현장에도, 제주도 아파트 시공 현장에도, 땅끝 마을 해남까지도 납품을 하고 있는 전일공구. 30여 년 간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쌓인 노하우가 어마어마할 것 같다. 그만의 경영 비법, 무엇인지 물어봤다.
지금의 전일공구는 팔복동 공구상가 입구에 위치한, 12년 전 당시 4억 들여 산 땅이다. 땅을 사기 위한 목돈은 아내이자 대표이사인 문복순 씨가 알뜰살뜰 살림해 모아왔다. 지역 은행에 한 달에 단 돈 3만 원이든 5만 원이든 꾸준히 출자를 하다 보니 목돈이 됐다. 여기다 대출 받은 돈까지 보태 더 좋은 위치로, 조금씩 입구 앞으로 위치를 옮기다 보니 20년 뒤 가장 좋은 자리인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조금씩 모으고 이사해서 가게 위치를 5번 옮겼어. 상가 임대한 게 아니고 우리 땅이니께 이제 더 이상 옮길 필요도 없고. 좋은 장소로 이사한 덕분에 대박 났제. 목 좋은 곳이 최고여.”
첨엔 땅을 사야할 지 말 지 고민도 많았다. 좋은 위치지만 부담이 컸다. 문 씨의 거듭된 설득으로 사게 된 땅은 결국 이 지역 보물이 됐다. 상가 입구, 눈에 띄는 매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매출을 10배 이상 불려 현재는 1500평의 공구 창고까지 마련했다고.
전일공구는 큰 업체들과의 거래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갑작스럽게 한 해 동안 3억 원의 거대부도를 맞기도 했다.
“옛날엔 어음 많았잖여. 연속으로 부도를 맞다 보니까 서울까지 소문이 난 겨. 이 집 어음은 부도난 거니까 받지 마라. 그 뒤론 소문이 나서 거래를 안 하려고 했지.”
거래처의 발길이 끊기기 전에 전 대표는 해결방법을 고민해야만 했다. 방법은 단 하나, 모든 어음 빚을 제때 갚는 거였다.
“어음 기한까지 맞추기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 갚아줬지. 집에 있는 통장도 다 깨고. 빌려서도 돈을 다 주니까 사람들이 신뢰를 하게 된 거여.”
그 후 딸 상민 씨는 가게를 살리기 위해 어음을 없애고자 굳게 마음먹었다. 그게 불과 3년 전 일이었다.
“어음 갚는 걸 제가 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이 통장, 저 통장 보면서 어음을 막아야 하니까. 어음을 없애기 위해선 예전에 어음을 끊어 놓은 것도 결재하면서 지금 구매하는 물건은 어음 없이 바로 현금결재 해야 하니까.”
한 번에 두 배로 결재한다는 게 너무 어려웠고, 포기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처음 3개월을 시작한다는 게 3년이 걸렸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 결국은 해냈다. 전 대표는 어음을 없앤 게 두 번째 대박이라고 웃음 지었다.
전 대표는 일본, 독일, 중국, 미국 등 해외 제품들을 공부해 온 게 지금의 큰 자산이 됐다.
“지금은 공구에 대해 금방 찾을 수 있지. 궁금한 걸 인터넷에서 찾아 바로 배우면 되는디 말여. 처음 공구상을 열던 당시는 자료가 거의 없었어. 일본에서 나온 카탈로그가 있었는데 그걸 사서 해석하려고 일본말을 배운 겨. 다른 나라 제품들도 다 같은 방법으로 공부를 했지. 그 나라 말로 배워야 설명서를 읽고 제품 정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응께.”
같은 제품이라도 나라별로 쓰이는 명칭이 달랐고, 전력, 길이 단위도 제각각이었다. 그 동안 꼼꼼히 체크하며 공부해 놓은 결과 이제는 어디서 어떤 제품을 사용해야할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해외 제품을 한국에서 쓰기 위해 어떤 물건으로 대체해야 하는 지, 반대로 해외서 쓰려면 어떤 물건으로 대체해야 할 지 말이다. 36년째 사업 동료로서 함께 공구상 살림을 꾸려오고 있는 아내 복순 씨가 옆에서 거든다.
“사장님이 통역도 하고 거래처 마음에 들게 일 처리를 해주니까. 미군부대에서도 오고, 해외 진출한 업체에서도 연락 많이 오죠. 지금도 새벽까지 공부를 해요. 3개 국어 공부를.”
이 공구상 안에서는 영어, 일어, 독어, 중국어까지 제품을 읽고 해석하는 건 다 된다. 영어로 주문 서류를 한 번 작성해주면 손님이 매우 만족스러워한다.
전주에서 세 번째로 시작해 이 지역 제일가는 공구상이 됐다. 겸손한 성격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그가 전국에서 알아주는 공구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 했을지 짐작이 간다. 사업을 하면서도 야간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금도 밤마다 스스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전 대표. 창고 곳곳 어지러우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쌓여있는 빛바랜 공구들은 주인과 함께한 세월을 보여주고, 그 옆에는 성공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