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호 대표는 경북 군위 출신으로 중학교 때 대구로 옮겨와 줄곧 달서구 장기동에 터를 잡았다. 공
구상사를 시작한 것은 24년 전. 코오롱엔지니어링에 다니다가 퇴사 후 친 형님과 함께 공구상을 시작
한 것이 형제툴링의 시작이다. IMF로 경제가 나빠지자 더 나은 길을 모색하기 위해 형님이 다른 사업
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박 대표 혼자 공구업을 계속하고 있다.
IMF와 2008년, 두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뚝심 하나로 버텼다. 장사가 안 될 때는 안 되는 대로 있는 물건으로 버티고, 잘 될 때는 잘 되는 대로 재고에 투자하며 버텼다.
“장사는 이런 패턴의 반복인 거 같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가게를 내실 있게 다져가며 안정적인 길을 찾아가는 거죠.”
처음 열두 평으로 시작했던 가게가 지금은 지하 창고까지 합쳐 100평에 이른다. 경기가 나쁘다는 핑계로 후원을 중단하거나 내 이익만 차리지 않았던 덕분이다
내 가정, 내 동네 행복이 희망사항
출소자 시설이 우리 동네에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을때도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컸다.
“일반 주민들이야 반대했지만 사람 사는 데 장의사든 화장터든 수감시설이든 누가 해도 해야 되는 일
아닙니까.”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경북지부 최용탁 지부장과는 특히 인연이 깊다. 최 지부장은 2001년 사
전면담위원회가 창립됐을 때 실무를 맡아 지금까지 후원 회원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최 지부장은 박 대표의 가장 큰 장점으로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꼽았다.
“그 말은, 그만큼 주변에 많이 베푼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활동을 남몰래 꿋꿋이 해온것을 전부 봐왔습니다. 크게 한번 돕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대단한 겁니다.”
박 대표에게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지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집사람요? 표는 잘 안 내는데, 좋게 생각할수도 있겠고, 안 좋아할 수도 있겠고... 뭐, 그래도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헛짓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요. 하하하”
주위에 어두운 소식이 줄어들고 내 가정과 동네가 행복해지는 것이 박 대표의 유일한 희망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