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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출소자들 새 삶 위해 아낌없이 지원




출소자들 새 삶 위해 아낌없이 지원

대구 달서구 형제툴링(주) 박무호 대표



일반적으로 출소자라고 하면 마주대하기 두렵거나 꺼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도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며 사회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돌보고 후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대구에서 공구상을 운영하고 있는 박무호 대표가 그 주인공.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박 대표는 십 년 넘게 이 활동에 적극적이다. 남 퍼주는 일에 일등이라는 박 대표의 남다른 인생 이야기가 궁금하다.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인연 맺어 13년째 활동

대구시 달서구 장기동에 위치한 형제툴링(주). 얼핏보기에는 여느 공구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무호 대표가 아내, 큰 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평범한 공구상사다.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박 대표에게 후원활동에 대해 묻자 자신은 특별히 한 게 없다며 말을 아낀다.
그가 출소자 후원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1년. 가게인근에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이 들어서면서부터다.
“바로 옆 건물이 팔리면서 뭐가 들어오는가 알아보니 1층에는 법무보호복지공단이 오고 2층부터 5층
까지는 출소자 생활관이 들어선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안 좋은 인식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처음에는 주변에 쉬쉬하며 시작했죠.”
평소 라이온스 클럽에서 활동하며 소외계층에 관심 많았던 박 대표는 이 사람들에게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사전면담후원회에 가입하게 됐다. 사전면담후원회는 출소 예정자들의 사회 안착을 위해 사전면담과 재활을 돕는 민간후원단체로 당시 10명으로 출발해 지금은 4,50명으로 늘었다.


넉넉지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후원

의식주 의탁, 긴급구호자금, 직업 훈련, 취업 여비등 사후관리 전반을 책임지는 것이 위원회의 주된
활동이다. 사실상 전부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출소자들이 완전히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사전 상담위원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고 다들 넉넉한 것도 아니다. 식당, 공구상, 월급쟁이 등 직업도 다양하다.
“식당하는 사람은 고기 가져다 주고, 어떤 사람은 쌀을 사서 갖다 주기도 합니다. 웨딩 관계자는 합동결혼식 때 후원하고. 외부 단체 자선행사 연결을 돕기도 하고요. ARS로 한 달에 1~2만원씩 꾸준히 보내는 사람도 있어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출소자 지원에 대한 편견도 크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불특정다수에 포함되며 누구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박무호 대표의 지적이다.
“출소자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배척하면 오히려 재범률만 높아집니다. 사회에 적응 못하고 생계 문제
로 재범을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해요. 전과 30범이 흉악범 같죠? 근데 그게 아니라 생계 문제가 해
결되지 않다보니 유예기간동안 재범이 반복돼서 전과가 늘어난 거예요. 도움의 손길이 있으면 이
런 범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당신이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통계에 따르면 일반 출소자의 재범률은 52%인데 비해 후원을 받아 재활을 거친 사람들의 재범률은
2.4%밖에 안 된다. 생활관에서의 지원은 최대 2년까지 가능하며 이후 창업 지원과 합동결혼식, 주거
등도 지원된다. 성공 사례도 많다.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지금은 작은 회사를 꾸리며 성공해 법무부 수상까지 한 사람도 있고 폭력전과를 딛고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서로가 노출을 최대한 자제하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불문율이다.
“특수성 때문에 서로 노출을 최대한 자제합니다. 먼 발치에서 소식을 듣고 독립된 사람으로 혼자 설 수 있게 서로를 보장해주는 거죠.”
이런 공로 덕분에 법무부장관 표창장과 대구고검 검사장 표창장도 수상했다.
“보람이 따로 있나요. 단지 출소자들이 자기가 외톨이라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나를 이해하려는 사
람이 있구나’라는 걸 느끼고 새 삶을 살아주면 좋겠어요.”



경영난 겪으며 뚝심 하나로 이룬 공구상

박무호 대표는 경북 군위 출신으로 중학교 때 대구로 옮겨와 줄곧 달서구 장기동에 터를 잡았다. 공
구상사를 시작한 것은 24년 전. 코오롱엔지니어링에 다니다가 퇴사 후 친 형님과 함께 공구상을 시작
한 것이 형제툴링의 시작이다. IMF로 경제가 나빠지자 더 나은 길을 모색하기 위해 형님이 다른 사업
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박 대표 혼자 공구업을 계속하고 있다.
IMF와 2008년, 두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뚝심 하나로 버텼다. 장사가 안 될 때는 안 되는 대로 있는 물건으로 버티고, 잘 될 때는 잘 되는 대로 재고에 투자하며 버텼다.
“장사는 이런 패턴의 반복인 거 같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가게를 내실 있게 다져가며 안정적인 길을 찾아가는 거죠.”
처음 열두 평으로 시작했던 가게가 지금은 지하 창고까지 합쳐 100평에 이른다. 경기가 나쁘다는 핑계로 후원을 중단하거나 내 이익만 차리지 않았던 덕분이다


내 가정, 내 동네 행복이 희망사항

출소자 시설이 우리 동네에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을때도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컸다.
“일반 주민들이야 반대했지만 사람 사는 데 장의사든 화장터든 수감시설이든 누가 해도 해야 되는 일
아닙니까.”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경북지부 최용탁 지부장과는 특히 인연이 깊다. 최 지부장은 2001년 사
전면담위원회가 창립됐을 때 실무를 맡아 지금까지 후원 회원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최 지부장은 박 대표의 가장 큰 장점으로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꼽았다.
“그 말은, 그만큼 주변에 많이 베푼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활동을 남몰래 꿋꿋이 해온것을 전부 봐왔습니다. 크게 한번 돕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대단한 겁니다.”
박 대표에게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지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집사람요? 표는 잘 안 내는데, 좋게 생각할수도 있겠고, 안 좋아할 수도 있겠고... 뭐, 그래도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헛짓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요. 하하하”
주위에 어두운 소식이 줄어들고 내 가정과 동네가 행복해지는 것이 박 대표의 유일한 희망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