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탐방
부산 영주상사
부산 국제시장에서 40여 년간 공구상을 운영해 온 영주상사 김재호 대표. IMF시절 근처의 많은 공구상들이 문을 닫았지만 영주상사는 남아 지금까지 문제없이 장사해 오고 있다. 여섯 평 작은 매장을 오랜 시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영주상사가 김재호 대표가 맨 처음 국제시장에 터를 잡았던 것은 80년대 초였다. 경기 좋던 당시 중도매로, 가까이는 부산의 근처 공구상 철물점들에 물건을 팔았고 멀리는 창원 마산 김해 양산 쪽 철물점들도 국제시장을 찾아 공구를 사 갔다. 그리고 부산항과 영도 쪽 조선업체들도 영주상사로부터 조선에 필요한 공구를 구입해 갔다. 당시 한 달 평균 매출액은 7~8천만원 정도. 좋을 때는 월 1억 매출도 찍은 적 있다. 그게 다 여섯 평 좁은 매장에서다. 변두리에 창고를 여러 곳 두고 물건을 팔았다. 직원도 서너 명 두고 하루에 오토바이로 10번도 넘게 배달도 다녔다. 당시엔 국제시장에 공구상이 100여 곳 가까이 됐다.
중도매로 물건을 팔던 당시, 영주상사는 국제시장에서도 조금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 이전해 국제시장의 메인 스트리트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국제시장 거리에 손님들이 북적북적 하던 시기였다. 도소매가 아니라 소매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김재호 대표는 많이 팔아도 마진폭이 적었던, 그리고 서너 개 창고를 유지하며 비용 부담이 있던 중도매를 접고 완전 소매로 영업을 전환했다. 중도매에서 소매 시장으로, 시장을 보는 눈을 키웠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IMF사태가 오기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
97년 말, IMF 외환 위기가 찾아왔고 곧이어 국제시장에서 영주상사와 함께 중도매상을 운영하던 공구철물점들은 하나같이 전부 문을 닫았다. 규모가 꽤 큰 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매로 전환한 영주상사는 힘들긴 했지만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중도매에서 소매로 전환을 하며 최미애 사모가 영주상사 운영에 동참했다.어쩌면 소매 전환 이후 영주상사의 성공에는 사모의 역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재호 대표와 최미애 사모는 매장에 방문한 손님을 결코 그냥 돌아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친절함과 정감이 묻어나는 대화가 그 무기다. 또한 사모는 방문 고객이 금액적으로 어떤 수준의 공구를 구입할 것인지 파악하는 센스가 뛰어나다. 대표 말로는 “가게에 들어온 사람 호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는지까지 알 정도”라 한다. 고객이 원하는 가격대에 맞는 공구를 추천함으로써 구입을 유도한다. 그만큼 고객의 만족도도 높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친절하게 대하고 고객의 구매만족도 역시 높은 영주상사에는 지금도 30년 넘은 단골손님들이 많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이른 시기, 보쉬며 블랙앤데커 등 여러 브랜드의 대리점을 내 인근 다른 매장과의 차이점을 둔 것 역시 지금의 영주상사가 있게 한 요인이다.
김재호 대표는 매장 운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인맥 관리라 한다. 대표가 말하는 ‘인맥’에는 물건을 구입하는 단골손님들 인맥 관리는 물론 물건을 들여오는 매입처 인맥 관리 역시 포함된다.
30여년 전 중도매하던 시기, 중도매 납품은 저렴한 가격이 우선이므로 각종 공구 유통업체들을 수소문해 판매할 용접기나 전동공구류 엔진공구류 수공구 등을 들여와 조선소 및 러시아 선박 납품 공구상 등에 중도매로 납품했다. 그리고 그 시기 알아뒀던 전국의 유통업체들, 해외 직거래업체들로부터 소매로 전환한 지금도 공구를 구입하고 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유지해 온 인맥 덕분이다.
현재 영주상사의 주 판매 품목은 오랜 세월 인맥관리해 온 업체들로부터 들여 온 각종 전동공구류들이다.
시장을 보는 눈을 키우고 들어온 손님 놓치지 않고 오랜 시간 인맥관리를 해 온 것. 이것이 경기가 가라앉은 지금도 영주상사가 잘 나가는 비법일 것이다.
글·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