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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꾸준히 욕심 없이 한 길만 - 광주 양동 고속철물상사 서육남 사장

꾸준히 욕심 없이 한 길만

광주 양동 고속철물상사 서육남 사장



광주시 서구 양동의 공구거리는 6.25사변 때 형성돼 전국에서 오래되기로 손꼽힌다. 복개천을 끼고 100년 전통의 양동시장과 연결돼 하나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우후죽순으로 시작돼 골목을 빼곡히 채운 가게들이 60년의 세월을 지나 지금은 산업용품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고속철물상사 서육남 사장을 만나 양동 공구골목과 그 간의 공구상 경영 이야기를 들어봤다.

피난 온 사람들이 형성한 양동 공구거리

광주에서 ‘양동’하면 100년 전통의 양동시장과 공구거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6.25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복개천 주변에 터를 잡고 미제 군수품을 유통하면서 저절로 공구상이 형성됐다. 그 당시부터 공구업을 시작한 고속철물상사 서육남 사장은 이 거리가 ‘원조공구거리’라고 말한다.
“시기적으로 따지면 여기가 전국에서 원조격입니다. 1950년대부터 시작해서 60년 역사가 있는 거리로 자리 잡았어요. 광주의 유통단지나 최근에 형성된 운암동 공구거리도 전부 이곳이 뿌리예요.”
그는 이곳 일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오래된 공구상인들과도 인연이 깊다.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서울, 부산, 대구, 목포 안 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시 각 도시마다 유명하다는 공구상들의 이름과 얼굴은 거의 꿰뚫고 있다.
“전국을 다니다 보니 많은 사람을 알게 됐죠. 서로 깊은 친분은 나누지 못했어도 누가 유명한 사람이고, 누가 오래한 사람인지 등은 전부 알게 되죠. 크레텍책임 최영수 사장도 그 중 한 명이고요.”





선박 부품 납품으로 전성기 누려

서육남 사장은 공구거래가 시작된 초창기에 양동에서 공구유통 일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공구업이 생업이 됐다. 공구상으로 터를 잡은 것은 1971년이 돼서다.
“초기에는 배터리 제조 회사에 납품을 했어요. 배터리 재료가 되는 주석, 납 제품을 납품하면서 가게 기반을 만든 거죠.”
가게가 자리를 잡자 일거리도 늘어났다. 특히 선박 부품 거래가 많았다. 고기잡이를 나가는 소형 선박들 위주로 전라도 일대와 울산, 부산에서도 거래가 쏟아졌다. 서 사장만의 선박 부품 노하우를 다른 곳에서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에서는 정해진 규격 그대로를 쓸 수가 없어요. 배가 물에 잠겼을 때와 육지에 올라와 있을 때 정밀도가 같지 않기 때문이죠. 배가 물속에 들어가면 본체와 부품이 너무 딱 맞아서 움직이지 않으니 제 구실을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부품을 맞춰도 배가 안 움직이니까 물속에 건졌다 넣어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다가 결국 우리 가게를 찾아오는 거죠.”
‘배 부품은 광주 고속철물이 최고’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라도 일대는 물론 울릉도, 포항, 부산, 울산에서도 부품을 맞춰 갔다.
“사람들은 그 먼 곳에서 광주의 작은 철물점에 부품 맞추는 것을 이해 못하겠지만 수십 년의 노하우 덕분에 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으로 건축 붐이 일면서 밤 10시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덩달아 가게도 조금씩 규모가 커지고 도매업도 시작하게 됐다. 서울, 부산 등 제조사를 일일이 방문해서 물건 가져오는 고된 날도 있었지만 하루하루 일하는 재미가 났다.





경제 고비 넘기면서 소매점으로 정착

서 사장은 전성기를 누리며 도매업으로 사업을 확장했지만 90년대 들어 상황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소형선박 사업이 사양 산업이 되면서 전라도 100여 개 조선소가 다 무너지고 두어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엎친 데 덮쳐 IMF 위기가 터졌다. 서 사장도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건설사와 제조사에 납품했는데 업체가 부도가 났습니다. 받을 돈도 떼먹히고... 한 10몇 억 손해를 봤어요. 내가 갚아야 되는 돈도 많은데... 그런데 어떡합니까. 내 돈은 떼여도 남의 돈은 떼먹을 수 없어서 결국 사업을 줄였죠.”
게다가 직원들이 부당이득을 취하는 사건마저 발생했다. 매출의 절반이 소리 없이 사라지다보니 마진은 없고 부채가 늘어나면서 결국 전부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약해서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참는 것으로 넘겼다.
그때를 전후로 소매상으로 돌아섰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다른 일에 도전해 보기도 했다.
“철물점을 잠시 멈추고 젖소 젖을 짜는 착유기 영업소를 잠시 했습니다. 그런데 18만원짜리 물건을 70~80만원으로 파는데 마치 도둑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물건은 잘 팔렸지만 차마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계속 그 일을 못하고 다시 철물점으로 돌아섰죠.”





꾸준히, 욕심 부리지 않기

소매상으로 방향을 잡은 서육남 사장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역시 아내다. 아내 강영희 씨는 동고동락하는 부부야말로 최고의 파트너라고 말한다.
“많이 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사업이 커진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더라고요. 가족이 서로의 고생을 알고 보듬어줄 줄 아는 게 가장 큰 행복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큰 아들도 가게 운영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서 사장이 아들에게 강조하는 점은 손님의 요구사항을 단번에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필요한 것을 설명하면 어떤 제품을 말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고, 이어 소비자가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여러 제품의 제조사, 단가, 장단점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의 매장 관리도 중요하다. 대전, 부산 등 다른 지역에 모범이 될 만한 공구상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직접 달려서 보고 온다. 수집해 온 정보를 우리 가게에 전부 반영하지는 못해도 때에 따라 운영 아이디어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소매상은 많은 장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크게 욕심을 안 부리면 손해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적당한 욕심은 발전을 주지만 지나친 욕심은 실패를 부릅니다. 어찌 보면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꾸준히, 욕심 부리지 않는 것’이 저의 경영 철학입니다. 많이 버는 것이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까요.”



우리 시장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양동 공구거리도 날마다 변하고 있다. 얼마 전 정부로부터 4억3천 만원 기금을 받아서 산업용품거리로 조성됐고, 30억 원을 투자한 주차장 사업도 한창이다. 서육남 사장이 이곳 산업용품거리 상인회장을 맡아 이 일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업계 공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 시장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근 시장 상권이 분리되고 마트들이 들어서면서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요. 게다가 덤핑과 리베이트로 이득 남기는 형태의 시장 거래가 계속되면 결국 상권이 다 같이 죽어버립니다. 티끌 모아 태산으로 커온 영세상인들이 대형유통사나 대기업 MRO 틈바구니에서 살아나려면 우리도 변할 필요가 있어요.”
“후배들을 위해서 선배들이 좀 더 관심 갖고 노력해야 한다”는 서 사장의 목소리에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