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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첫손님에 대한 고마움 잊지 않을래요”



“첫손님에 대한 고마움 잊지 않을래요”

광주 동성공구 김형관 대표




초심(初心). ‘처음에 먹은 마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이 말은 사람들이 뭔가를 새롭게 시작
할 때,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잡으려 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행동
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광주 서구 매월동 광주산업용재유통센터에 위치한 동공성구.
동성공구 김형관 대표는 가게 문을 처음 열었던 날, 일부러 자신에게 찾아와 1~2만원을 구
매해준 손님에게 느꼈던 그 고마움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늘 노
력한다는 그의 공구상을 들여다봤다.


시작은 4평 점포부터


김형관 대표가 공구상 일을 처음 시작한 것은 지난 1994년도부터다. 지금도 여전히 성업 중인 광주 북구 운암동 공구의 거리에 위치한 한 공구상에서 직원으로 입사해 영업을 전담했다.
물론 훗날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던 김 대표였지만 당시 공구상 독립은 솔직히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는 형님에게 돈을 빌려드렸었어요. 그래서 그 형님이 두 곳에 점포를 냈었죠. 근데 둘 다 신경을 쓰기가 조금은 힘에 부쳤나 봐요. 그래서 한 곳을 제가 인수하게 됐고, 별다른 준비과정 없이 독립을 하게 됐어요.”
2000년도 1월 1일. 만물공구라는 간판을 달고 광주 동구 금남로 롯데백화점 인근에 공구상 문을 열었다. 사전준비에 철저하지 못한 탓에 지금으로써도 꽤 비싼 금액에 가게를 인수받았다고 했다.
“거래선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소매가 주가 됐고요. 4평 정도밖에 안됐어요. 그런데 그때 북구에서부터 절 보고 찾아오시던 분이 저희 가게에 오셔서 물건을 많이 팔아주셨어요.”
전국의 장을 돌아다니면서 간단한 수공구 등을 팔던 상인 한분이 일주일에 두어 번 씩 잊지 않고 김 대표네 가게를 찾아왔다. 그가 찾아오는 날이면 15~20만원 상당의 물건을 사서 가곤 했는데, 김 대표는 당시 그분이 그렇게 고마웠다고 했다.
“당시 한 달 매출이 300만 원 정도였던 때였어요. 그러니 하루 매출 15만원이면 제게는 무척 큰 거였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공구를 통해 아내를 만나다

광주사람은 흔히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 마련인데, 아내 이경희 씨는 어찌된 일인지 호남 특유의 억양을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읍이 고향이었던 아내는 고등학교 졸업후 줄곧 서울에서 살다 김 대표를 만나 광주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2001년 3월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정읍에서 공구상을 하고 계셨던 장인의 소개로 98년도에 처음 만났죠. 그때는 뭐 연애방법에 별다를 게 있었나요? 전화랑 편지만 오고갔었죠. 그러다가 연락이 잠시 끊긴 적도 있었어요. 그땐 아내도 저도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아내와 결혼 후에도 4평 가게에서 6개월가량 더 있었다. 이후 광주 서구 산업용재유통센터에 10평짜리 가게를 임대로 들어오기로 결정했는데 이때도 아내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의 삼촌 도움이 힘이 됐다.
“유통단지에 들어와서 소매 위주를 벗어나 도매를 시작했습니다. 물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죠. 이때 아내집안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처삼촌이 시흥에서 공구상을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도움을 구했더니 1억 원이나 되는 큰 금액의 물건 값을 조건 없이 저희에게 주셨어요. 신용이 생명인 공구업계에서 이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대신 언제 어떻게 대금을 갚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내와 함께 3년에 걸쳐 그 대금을 거의 갚았어요.”
이후 다시 처삼촌을 찾아갔을 때 그는 부담 없이 물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하게 발주하라며 힘을 실어줬다고 했다. 김 대표네 상호가 동성공구가 된 것도 처삼촌의 상호를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다.
“그분의 도움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상호를 그대로 따오고 싶었어요. 서구로 옮겨오면서부터 동성공구라는 상호를 사용했죠. 허가도 흔쾌히 해주시더라고요.”

  

진열로 소비자 주목 끌고 신뢰 쌓고


매입거래처도 직접 소개해주고 보증까지 서주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 처삼촌 덕분에 김 대표는 공구상을 운영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남들보다 적게 겪었다고 했다.
“6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소매는 물론 도매도 매출이 점점 올랐죠. 그 후 단지 내 지금 자리, 30평 규모로 가게를 옮기게 됐습니다. 물론 상호명은 그대로 가져오고요 4년 정도 임대로 가게를 운영하다 소유주가 건물을 판다는 연락을 받고 지금의 가게를 인수했다고 했다.
“가게가 넓어지니 디스플레이가 매우 중요해 졌어요. 저나 제 아내 모두 깔끔한 성격이기 때문에 직접 진열을 다 하곤 했죠. 다들 그렇겠지만 거래업체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이 깔끔해야 더 신뢰가 가잖아요. 소비자들도 물건 찾기 편하고... 그런 인상을 손님들에게 주기위해 진열은 각별히 더 신경을 썼습니다.”
김 대표의 말에 따르면 매장 디스플레이는 결코 무시에서는 안 될 매출 인상의 중요한 요소다. 손님들에게 첫 인상을 좋게 심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매 손님의 경우에도 자신들이 자주 찾는 특정 물건에 대해 늘 그 자리에 둔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 직접 고를 수 있게 돼 시간절약적인 측면에서도 효율적이라는 것.
“정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공구의 종류에 따라 코너와 구역을 나누고 직원은 물론 소비자들도 금방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을 찾을 수 있도록 진열을 재정비할 예정입니다. 소비자에게 구경할 거리를 많이 주는 것도 디스플레이를 신경 써야 할 이유거든요.”
공구상가 내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위치’가 아닌데도 동성공구에 사람이 모이는 이유도 진열의 힘이라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저희 위치가 사실 A급은 아닙니다. 상가 전체적으로 볼 때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위치죠. 위치적인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게 바로 진열이 가진 강점이죠.”



처음 마음가짐을 끝까지


동성공구는 어떻게 하면 고객들의 만족을 높일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시행한 것이 일정 금액 이상 고객이 물건을 사게 되면 덤으로 사은품을 주는 것. 사은품은 손님이 산 물건과 비슷한 종류의 다른 공구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마트에서 말하는 원 플러스 원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되요. 물론 정해놓고 한 것은 아니지만 손님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될 수 있는 한 해주려고 하고 있어요.”
김 대표가 꼭 지키려고 하는 판매 원칙도 있다.
“소매가와 도매가에 대한 차이를 주려고 해요 소매 손님에게 도매 손님에게 드리는 가격으로 물건을 산다면 도매 손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이것은 전체 공구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도매는 도매원칙을 지키고, 소매는 이익 금액을 덧붙여 팔고 있어요. 대신 소매 고객분들에게 금액을 저희가 낮춰드리지 못하니까 사은품 형식의 ‘덤’을 드리려고 하는거구요.”
13년의 세월동안 동성공구는 많은 변화를 거쳤다. 4평의 규모는 30평을 넘어섰고, 매출로만 따져도 예전에 비해 20배가 넘게 성장했다.
“열심히 한 만큼 좋아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해온 횟수만큼 가게도 성장한 것 같구요. 거래처와 매출 모두 늘어났다고 보면 됩니다.”
김 대표는 ‘초심을 잃지 말자’를 경영 철학으로 삼고 있다. 광주 동구 대인동에서 서구 매월동으로 옮겨오면서 이 초심을 잃은 것 같아 항상 자신의 마음을 다 잡으려고 노력한다.
“하루 매출 20만원이 크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는데 이게 어느 수간 참 작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대인동 시절부터 단골이셨던 고객을 소홀하게 대한 적이 있었죠. 매출을 많이 올려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정말 힘들었을 때 도와주던 분들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덜컥 겁이 났죠.”
김 대표는 안일함에 빠진 자신에 대해 질책을 했다고 했다.
“어려웠을 때 도와줬던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겠죠. 그리고 그 분들을 잃어버린다면 제 미래도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돈 많이 벌더니 신경을 안 쓰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제가 쌓아온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제 사업 운이 다해버린 것과 진배없을 거예요.”
공구상을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객과 함께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김형관 대표가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들어봤다.
“저 하나만 믿고 광주까지 와서 그동안 고생 많이 했던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고 감사함을 느낍니다. 엄마, 아빠가 가게 일 때문에 바빠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했는데도 활발한 성격으로 잘 자라 준 12살 딸, 10살 아들도 너무 고마워요.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