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탐방
인천 이룸하우스
공구상은 운영하는 계기는 다양하다. 아버지가 공구인이어서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경우가 있고 또는 직원으로 오래 일하다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 경우가 있다.
혹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으로 공구상을 차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룸하우스 신창훈 대표는 전문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다 공구상을 차렸다.
공구인들은 공구상을 운영해 모은 돈으로 자신의 건물을 지으면서 작은 건설사나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룸하우스 신창훈 대표는 반대로 인테리어 전문업체를 운영하다 공구상을 시작했다.
“건물이나 아파트 리모델링부터 병원, 미용실, 커피숍, 나이트클럽 인테리어를 전문적으로 20년 넘게 했습니다. 현재 함께 일하는 정직원은 10명이 넘는데요. 공사를 크게 할 때는 단기적으로 고용하는 인원이 50명이 넘어설 때도 있죠. 건설현장에서 공구를 사용하다보면 공구가 금방 닮거나 마모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공구상가서 공구를 사면 시간이 많이 낭비 되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동네에 작은 공구상을 차리고 현장에 사용하는 공구를 직접 구매해 쌓아두고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동네 철물점을 운영하게 되었죠. 동시에 저희가 사용하고 보유한 공구를 협력사가 찾으면 공구도 납품하고요. 여기 공간이 때로는 직원들의 휴식공간 회의공간도 되고 동네사람들의 인심 좋은 사랑방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룸하우스가 관리하는 LH아파트는 수 천 세대다. 수원, 동탄, 파주는 물론 평택에 이르기까지 업체의 요청을 받고 아파트 하자를 보수한다. 인천에 거주하는 직원들이 때로는 수원 때로는 파주로 일하러 가기 전 아침마다 이곳에서 회의도 진행한다. 현재 발생하는 공구상의 매출 상당 부분은 자신들이 사용하거나 협력사에 판매하는 경우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이 찾아오며 물건을 사가는 일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LH하자보수협력업체로 일하게 되면서 직원들과의 논의 끝에 공구상을 시작한 것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어떻게 보면 저희는 인테리어 업체에서 운영하는 공구상이라서 인테리어에 사용되는 공구를 대부분을 취급합니다. 그런데 가게가 있는 곳이 상가지역이나 도시 외곽의 외딴곳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찾는 생활용품이나 월동용품도 취급하고 있어요. 정식으로 공구상을 운영하는 것이라 그때 그때 문 열고 닫는 것이 아닙니다. 직원 1명이 꼭 상주하거나 사장인 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죠.”
신창훈 대표에게 수 천 세대의 LH아파트 하자보수 계약을 따게 된 연유를 물었다. 1995년 이후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며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거래처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켰던 것이 좋은 인연을 만든 비결이라고. LH 하자보수 같은 큰 계약도 그런 인연이 쌓여 돌아온 결과다.
“인테리어를 하면서 공구유통 도매업체와 직접적으로 거래하면서 보유하는 공구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몇몇 공구상은 동네 철물점으로 사업을 하면서 동네 집수리 사업도 같이 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먼 미래에는 그런 경우도 생각하고 있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매장도 더욱 커져야 할 것이고요. 돈을 크게 벌겠다는 각오보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좋은 관계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어요. 인정 많은 동네 철물점을 시작한 것도 긴 시간 함께 해온 직원들의 미래를 생각해서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인테리어 작업 이외에도 공구장사라는 사업 방식과 노하우를 익히길 바랍니다.”
신창훈 대표의 과거는 평범한 공구인의 이력과 남다르다. 1963년생의 그는 군대 전역 후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 관련 디자인을 배웠다. 그가 군대를 전역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의 인쇄 디자인은 인화지에 글자가 들어간 필름을 대고 한 글자씩 감광시키는 ‘사진 식자’ 방식에서 ‘매킨토시’나 ‘QuarkXPress’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방식으로 변화하는 시대였다. 그때 그는 남보다 빠르게 프로그램을 다루면서 인쇄 매체 디자이너로 사회에 자리 잡게 된다.
“운 좋게도 시대 변화가 있는 업종에서 변화에 잘 적응 했던 것 같아요. 1980년대 수 백 만원하던 디자인 프로그램 보유한 컴퓨터 한 대로 창업해 직원 10명을 둔 디자인 회사를 운영했어요. 유명 가수의 카세트 테이프 속지를 디자인하거나 삼성전자 휴대폰 외부 포장 종이 케이스도 디자인 했었죠. 그런데 저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건물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꿈이었고 또 목표였고요. 1995년 회사를 대기업에 팔고 건물 및 인테리어 디자인에 뛰어들게 되었죠.”
30대 초반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리모델링 의뢰 받은 건물을 훌륭하게 다시 인테리어해 건물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다양한 작업을 했다.
“저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를 관계라고 보거든요. 싫든 좋든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고요. 처음에 제가 손해 봐도 결국 좋은 결과로 돌아오더라고요. 인연이라는 것은 그래서 소중하죠.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저의 관계가 단순한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 거래처도 마찬가고요. 이룸하우스가 있는 동네 주민들도 마찬가지고요. 자랑 같지만 저는 거래처로부터 부도 맞은 적은 없어요. 받을 돈 못 받은 적도 없죠. 물론 하청에 하청을 받는 현장 일을 하다보면 임금이 몇 달 늦게 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도 이익보다 관계를 우선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면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동네 공구상 운영도 마찬가지고요.”
신창훈 대표가 운영하는 인테리어 사업체 이름은 이룸하우스다. 이룸하우스 간판 옆에는 우리동네철물점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하고 있다. 취재 도중에도 동네 주민들이 배추와 나물을 들고 찾아와 먹으라며 이룸하우스를 방문했다. 이름 그대로 우리동네철물점 이룸하우스를 응원한다.
“저는 살면서 굉장히 힘든 것도 겪어봤고 아파보기도 했죠. 그래도 삶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봐요. 실제 성격도 긍정적이고요. 이익보다 미래 훗날을 생각합니다. 사실 돈이 100억 있어도 그 돈 다 쓰지 못하고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리고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100억이 있어도 밥 한 끼 살 줄 모르는 사람 만나면 느끼는 것이 많죠. 그래서 직원들에게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너도 나도 다 같이 밥 먹고 살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직원이 가족 같아요.”
글·사진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