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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한반도 최남단서 성공을 일궈라 - 해남 땅끝공구 최계송 사장



한반도 최남단서 성공을 일궈라


해남 땅끝공구 최계송 사장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의 땅끝. 이곳에도 공구상은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15여 년 전 타지에서 해남으로 터전을 옮겨와 공구상을 차리고 자리를 잡은 이가 있다. 각종 공구는 물론이고 웬만한 공구의 AS까지 해주고 있어 주변 손님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이젠 해남에 없어서는 안 될 공구상이 된 그곳, 바로 땅끝공구다.


너른 가게, 깔끔한 진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 준비하던 시각, 오후 5시가 되서야 해남 땅끝공구에 도착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자리한 땅끝공구는 인근 공구상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 공구상들과 비교해 가장 큰 점포규모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행길에 공구상을 찾지 못할까봐 전날 미리 걱정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쭈뼛쭈뼛 안에 들어서서 주위를 살폈다. 밖에서 봤던 짐작했던 것보다 실제 안에서 살펴본 2층 규모의 내부는 훨씬 더 컸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대충 가게 좀 정리하구요.”

 
‘암, 그렇고말고요. 얼마든지 기다려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주변구경에 푹 빠졌다. 여기저기 설치된 CCTV 카메라. 종류별로 나란히 정돈된 공구들, 쓰임새에 따라 정확히 구분된 진열장. 오랜 세월에 허름하고 낡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무참히 깨버린 가게 모습이었다. 혼자서 가게 구경만 해도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한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여기 규모가 어떻게 되나요?” “아마 300평은 족히 넘을 겁니다.” “그럼 진열된 물건들을 모두 합하면 그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정확히 셈할 수 없어도 15억 원 정도는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억~!’소리가 절로 나올 뻔 했다.
수공구, 자동차공구, 배관공구, 에어공구, 전기전자, 철물자재, 목공구, 측정공구, 유압공구, 절삭공구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분화된 공구들이 보기 좋게 정리돼 있었다. 나중에 세어보니 구분된 종류만 17가지가 넘었다. 카운터 뒤편에는 AS실로 보이는 수리장소가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을까.
“자, 이제 한숨 돌렸네요. 많이 기다리셨죠?” 최계송 사장이 인사를 건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공구를 택하다
무뚝뚝하지만 ‘젠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올해로 15년째 공구상 일을 하고 있다는 최 사장은 공구상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의 호텔경영학과를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쑥스러운데요. 그때는 단순히 호텔에서 일하는 것이 멋져 보여서,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선택했던 학과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이상과는 달랐다.
“공부를 해보니 나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벨보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렇게까지 일하는 게 맞나 생각이 들었어요.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화순에서 섬유와 관련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대가 짊어지기에는 다소 많은 액수의 빚까지 생겼다. 덜컥 겁이 났다.
“지금으로선 별것 아닌 액수였을지도 모른데 그때는 젊은 나이에 빚이 생기니 걱정이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고향 선배가 제안을 했어요.”
선배가 한 제안은 다름 아닌 ‘자신이 일하는 공구상에 직원으로 들어와서 일을 도와주면 빚을 다 갚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빚을 어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여서 선배와 함께 일을 하게 됐습니다.”



화순에서 해남으로
 
화순에서 공구상은 생각보다 잘됐다. 하지만 전혀 인연이 없는 곳에서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순 사업을 정리하고 생긴 돈을 들고 해남으로 옮겨왔다. 나름 해남에서 공구상을 하면 가능성이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90년대 말, 2000년 초였는데 그때만 해도 해남은 AS가 잘되는 편이 아니었어요. 마을 사람들끼리 수리가 필요한 공구가 있으면 모아두었다가 광주로 나갈 때 가지고 가서 수리를 받아오곤 했지요. 그만큼 수요는 있는데 그를 충족시킬 여건은 안 된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잘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지요.”
20평 남짓한 가게를 선배와 함께 인수했다. 입지조건 등을 따질 형편은 못됐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 형편에 맞는 가게를 선택했을 뿐이다. 자신의 가게가 생기자 그 다음 드는 생각은 잘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그 선배 형 때문에 그랬던 것도 있어요. 정말 4시간만 자고 20시간을 모두 공구상에서 먹고 자고 일했어요. 기계도 하나하나 뜯어보며 AS 노하우를 익혀갔죠. 지금 생각해봐도 그땐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를 정도에요.”



그리고 원칙
 
2002년 사업자등록 절차를 마치고 완전히 독립했다. 2005년 50평으로 가게를 늘렸고 2010년 지금의 자리로 가게를 옮겼다고 했다.
“이익률을 낮추고 될 수 있으면 저렴한 값에 공구를 소비자들에게 판매했어요. 판매한 물건에 대한 AS도 철저히 했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해남 소비자들에게 입소문이 났어요. 개인적으로는 이게 바로 가게가 커가게 된 비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꼭 지키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직원들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AS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이 원칙들을 꼭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다.
“선배와 일을 하면서 가게에 대한 기본 운영 이념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웠다고 해두는 게 맡겠죠.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고, 미래의 저에게도 영향을 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