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체메뉴 열기

공구상탐방

검전사 30년, 금교춘 대표


3평 매장에서 시작, 역경극복하며 달려온 30년

대구 (주)검전사 금교춘 대표





대구 북성로 공구거리 입구에 자리잡은 ‘검전사’. 외관은 많이 바뀌었지만 북성로를 대표하는 공구상사이자 전동공구 전문회사로 오랜 시간 손꼽히는 곳이다. 없는 것 없는 다양한 제품구색과 편리한 물류시스템, 깔끔한 진열대가 눈길을 사로잡는 한편, 즉각적인 AS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검전사 30년의 시간 동안 신나게 사업을 일궈온 적도,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적도 있다는 금교춘 대표. 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잘 해준 아내와 건강하게 잘 자라준 자녀들, 그리고 각자의 업무에 열정을 다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고맙단다. 함께 더 즐겁고 행복하게 미래 30년을 가꾸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는 그에게서 베테랑 공구인의 뚝심이 전해진다. 



검전사 30년 저력, 가족같은 직원들에게 있지요





북성로가 제2의 고향이시라면서요? 
제가 북성로에 와서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고등학교 갓 졸업 후인 1977년이었어요. 고모부가 이 근처에서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셨는데, 거기서 처음 일을 배웠죠. 그때부터 40년의 세월이니 북성로가 제2의 고향 맞지요? 일 시작하고 2년차부터는 기사와 함께 지방 철물점을 다니며 카세일을 했어요. 그때 많은 경험도 하고, 대인관계도 쌓을 수 있었어요. 장사부터 배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87년, 27살에 검전사란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니까요. 
처음엔 3평으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수완이 없었지만 점차 자신감도 생겼죠. 수년간 종업원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어요. 도박에 빠져서 어음 끊고 돌려막기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는 모습도 봤고, 성실하게 일해 부동산으로 큰 수익을 얻었지만 무리하게 재투자해서 또 실패하시는 분도 봤어요. 이를 반면교사 삼아 10~20만원의 월급을 알뜰하게 모아 600만원을 만들었죠. 3년간 군대 복무 후 다시 200만원을 모아 여기 코너에 3평의 점포를 얻을 수 있었어요. 보증금 200만원, 수리비 100만원을 제외한 500만원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자금이 부족해서 물건을 많이 갖추지 못했어요. 가게 입구에만 제품을 진열하고, 정작 진열대에는 빈 박스를 두었죠. 그런데 수년간 성실하게 일해 온 저를 아는 주변 도매상이 팔아서 갚으라며 물건을 위탁해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기반을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30년 경영해오시면서 어려움도 많으셨으리라 봅니다.
처음엔 소매위주로 시작해서 첫 1~2년은 적자였어요. 한달에 고작 200~300만원 매출을 내다보니, 직원 1명 월급 주고나면 겨우 현상 유지하는 거죠. 제 월급은 꿈도 못 꿨어요. 3년 후부터 매출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제 월급도 20만원씩 가져갈 수 있었고, 재미가 붙기 시작했지요. 창업 5~6년차 쯤 되어 매출이 많이 커졌죠. 검전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는 재테크가 아닌가 싶어요. 임대해 있던 건물을 사고 싶어 건물주에게 대우를 잘 해드렸죠. 설이면 세배하러 가고, 매장에 들르시면 아무리 바빠도 꼭 점심 한 그릇 대접하곤 했어요. 그렇게 신용을 얻으니까 건물을 팔 때 가장 먼저 얘기해주시더라고요. 처음엔 12평을 샀어요. 그 이후 세 차례 건물을 더 매입해 리모델링하면서 도매도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의 건물 모습이 되기까지 다섯 번 새로 지었다고요?
처음에 고생 많이 했죠. 대출을 많이 내다보니 후회도 하고요. 건물을 뜯어놓고 4~5개월 간 환경영향평가심의 통과과정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다행히 일부매장은 남겨두고 건물을 지은 덕분에 영업을 계속 할 수 있었지요. 과정은 힘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물류 시스템이 잘 되어 있으니 물류비도 적게 들고 인건비도 절감돼요. 투자를 많이 한만큼 경쟁력도 높아졌다고 봅니다. 진열이 잘 되니 제품관리도 잘 되고, 재고파악도 잘되고요. 이 건물이 준공된 건 2014년인데, 사옥을 완성하기까지 다섯 번 새로 짓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차츰차츰 늘려나간 거죠. 


위기가 있었을 때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IMF 외환위기 때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으셨겠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당시에는 주로 건설, 설비, 전기 등 현장납품을 많이 했어요. 외상판매도 많았죠. 그때 2억원 가량의 외상이 있었는데, 손님도 잃고 돈도 떼이고, 결국 1억원만 회수할 수 있었어요. 엄청난 손해였죠. 그 후부터는 외상을 안 하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1년간 매출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되나 밤잠도 설쳤죠. 그러면서 납품은 접고 도매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됐어요. 그 외에도 최근까지 위기는 많았죠.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한번은 도로 터널공사 입찰에 참여한 한 손님이 고압세척기를 임대해 간적이 있는데, 제가 기계를 잘못 줘서 그 손님이 큰 손해를 입은 적이 있어요. 화가 난 손님이 가게에 찾아와서 제 뺨을 때렸어요. 아내 앞이라 화도 났는데, 제가 잘못했기 때문에 참았어요. 결국 손님이 사과하고 가셨지만, 그날 일이 아내와 저, 직원들에게 산교육이 된 것 같아요. 


 
매장 진열이 깔끔합니다. 특별히 추구하는 바가 있으신지요?
일본에 여행가서도 보고, 다이소나 마트같이 잘 진열해놓은 매장을 벤치마킹했지요. 그전에는 직원들이 일일이 찾아서 손님에게 보여드렸다면, 이제는 손님들이 직접 둘러보고 편하게 쇼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겁니다. 인건비는 적게 들고 매출은 늘고, 일석이조죠. 최근 30주년 워크숍으로 직원들과 함께 대마도에 갔는데 슈퍼, 잡화, 옷, 철물건자재 등 가정에서 쓰는 물건들이 단지별로 되어 있는 게 참 특이했어요. 매장에 진열해 놓은 것도 한 걸음 앞서 나가더라고요. 다니면서 많이 보고 또 배우고 있어요. 일본, 중국, 대만, 독일 등 전시회 및 박람회에도 다니며 새로운 브랜드나 품목을 찾곤 합니다.
후배 경영인들, 특히 직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잔소리 많고 간섭 많이 해도 제 진심을 알아주고, 오랜 시간 옆에 있어준 직원들이 저는 참 고마워요. 지방에서 올라와 집이 없는 직원이 있으면 방도 얻어주고요. 저는 우리 직원들과 함께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직원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집에 근무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회사에 득이 되게 하고, 또 나가 독립할 때는 담당했던 단골고객도 데려 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본인도 먹고 사니까요. 저 또한 그렇게 컸어요. 2세가 아닌 종업원 출신이잖아요. 그렇게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합니다. 그래야 서로 발전하지요. 한가지 더 있다면, 나름의 전문성을 갖추고 남들이 하지 않는 특수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을 이끌어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남들이 이미 다하고 있는 걸 하면 고생만 하고 이윤이 없어요.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해요. 자기만의 제품, 또는 브랜드를 가지고 앞서나가야지요.
 
금교춘 대표는 현재 ‘공사모(대구의 공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3대 회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1개의 중도매업체가 매월 둘째주 목요일에 모여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 협력을 위해 정보도 교환하고, 전문브랜드는 팔아주기도 한다.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협약하는 한편, 공동체로서 믿고 의지하고 있다. 
“중도매업이 쉽지 않아요. 다행히 대구는 공구유통업 하는 사람들 간 단합이 잘 됩니다. 이는 검전사 창업이념과 일맥상통해요. 처음 개업할 때 조부님이 써주신 글귀가 있는데, 검전사의 경영철학이 됐지요. ‘숭덕광업(崇德廣業), 덕을 베풀어 사업을 크게 이루라’란 뜻입니다. 그 가르침을 늘 기억하며 협력사나 고객을 대하려고 합니다. 같은 업종 간에는 선의의 경쟁을 하고, 소매상이나 거래처에게는 정당한 가격을 받고 팔 수 있도록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윤을 떠나서 신용을 먼저 얻는 거지요.”


글_김연수·사진_이창우(유씨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