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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성 의자 국내 첫 도입 - 토치


기능성 의자 국내 첫 도입 - 토치




철재 사무용부품 제조업체로 시작해 의자 전문브랜드로 자리잡기까지 혁신과 열정으로 일군 40년. 
‘횃불’이란 뜻을 지닌 토치(Torch)의 열정과 그 불길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김태호 대표의 바람처럼  새로운 40년을 향해 재도약하고 있다.

남다른 기술력과 뛰어난 디자인으로 주목

토치는 사무용 의자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한편, 캐비닛과 책상 등을 제작, 납품하는 종합사무용가구 전문기업이다. 2015년 대한민국 우수특허 대상, 정부조달 우수제품 지정은 물론 중소기업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남다른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각종 상을 휩쓸기도 한 만큼 뛰어난 제품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토치의 모든 제품은 김태호 대표의 아이디어와 열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전문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쳐 하나의 제품으로 탄생된다. 
“작은 부품에서부터 시작해 기술 부분은 직접 다 챙깁니다.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바로바로 메모하기도 하고요. 부품사업을 계속 해오다 보니 취급하는 품목이 아주 많아요. 요즘은 종류를 공용화해서 원가를 줄이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대변하듯 김 대표의 사무실 한 켠에는 의자 부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최근 토치는 책상 15시리즈를 새롭게 출시해 오피스 가구의 또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제품 개발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한편, 사무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품목으로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는 것. 
“기능도 기술이지만, 디자인도 기술입니다. 밝고 부드러운 곡선디자인에 컬러도 시대 트렌드에 맞게 감각적으로 구현했죠.”
현재 토치가 보유한 특허는 12종, 디자인도 별도로 12종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 소멸된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가지에 이른다. 

 
인체를 연구한 인간 중심 의자 생산

토치는 인체를 연구한 과학적인 설계에 기반한 의자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에어백이 내장돼 있는 성능인증제품 미라체(MIRACHE)에서부터, 정부조달 우수제품 인증을 받은 아이리스(IRIS). 그리고 간편한 탈부착이 가능한 프리(FREE) 시리즈까지,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을 갖춘 의자 제품을 다수 출시하고 있다. 
“아이리스는 자체 금형제품으로 토치에서 내세우는 가장 고퀄리티 제품이죠. 사용자의 척추와 요추가 등판에 밀착되도록 설계돼 있어요. 장시간 앉아 있어도 인체의 피로도를 줄여주어 업무 효율을 높여줍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좌우 15도 회전이 가능한 유동형 등판 시스템과 스프링 텐션 조절기능,  착석시 좌판이 등판 방향으로 접근하여 앉는 위치가 자동 조절되는 기능 등은 토치만의 특허 기술이다. 그 외 좌석에 공기가 통과하는 통풍기능으로 땀이 차지 않도록 설계돼 있는 것도 강점이다. 골드, 레귤러, 베이직 등 기능과 소재에 따라 선택의 폭도 다양하다. 
프리 시리즈는 머리, 등판, 좌판에 원터치 시스템을 적용, 오염 발생시 손쉽게 탈착하여 세탁이 가능한 제품이다. 언제나 새것처럼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미라체는 사용자가 앉았을 때 좌판부분의 공기를 배출해주는 헬스 에어쿠션을 적용했다. 척추를 탄력 있게 받쳐주는 한편, 요추 부분으로 배출된 공기가 이동하여 허리를 지지해준다. 또 사용자의 움직임에 맞추어 등판과 자판의 움직임이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프론 매카니즘을 채택하고 있다. 
 
열정, 그리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1978년 토치의 전신인 철재 사무용부품을 만드는 ‘대신공업사’를 설립한 김태호 대표는 원래 철재 사무용부품을 제조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현장책임자로 4년째 일하던 어느 날 막연하게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막상 그만두고 나서 철재 사무용부품사업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샘플 하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사전에 계획을 한 퇴사가 아니었던 만큼 샘플이나 여러 가지 준비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았던 것. 
결국 고철로 나가는 불량품을 참고로 금형을 시작했고, 스스로 하나하나 연구하면서 제품을 개발하게 됐다. 서른 살에 사업을 시작한 김 대표는 10년 만에 업계 최고로 올라섰다. 전국에서 독점 판매로까지 이어진 것. 
“시작 동기는 막연했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서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처음 6개월 정도 생산하고나서 영업현장에 나가니까 생산자보다 판매자가 고이윤을 챙기더라고요. 제품개발과 생산, 관리의 고통을 안고 제품을 만든 생산자가 이윤을 같이 나눠야되는데, 오히려 이용만 당하는 느낌이었죠.”
1978년 당시 물류 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공급받아도 제대로 공급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거래처들은 하물며 대구에서 공급받아서 제대로 유통이 되겠냐며 아예 상담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판매처 몇 군데를 다니다 결국 방향을 돌렸어요.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공을 들이자, 공을 들이더라도 말이 많은 사람에게 공을 들이자’라고 생각한 거죠. 한 업체에서부터 시작해 2차, 3차로 전파될 수 있기를 기대한 겁니다. 그렇게 샘플을 보내고 3개월 정도 공급하다보니 간접홍보가 많이 됐어요.”
그렇게 직접 거래처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제품을 알리고 판매했다. 직거래하면서 회사는 급성장하게 됐고, 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영업방향을 돌리는 게 오히려 시장을 독점하는 비결이 된 것이다. 


 
기능성 의자 국내 첫 도입
 
“88년도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를 통해 유럽에 나가게 됐어요. 12명이 5개국을 방문해 산업현장을 시찰하는 일정이었죠. 철재 사무용부품 분야에서는 이미 최고로 올라섰기 때문에 다른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었죠. 당시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서 욕조디자인 분야를 생각하고 일정에 나섰어요. 독일에서는 크게 얻어진 게 없었는데, 두 번째로 방문한 영국에서 아이템을 발견하게 됐어요. 한 은행에 들어갔는데 의자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바로 의자를 뒤집어 봤죠. 메이커를 확인하고 가이드 한명과 같이 그 회사를 찾아 나섰어요. 영국은 물론 다음 방문국가였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4개국에서는 의자 제조업체만 방문했습니다.”
가이드와 택시를 타고 다니며 유럽의 의자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는 등 김 대표의 마음은 그때부터 오직 의자를 향했다. 영국의 한 은행에서 본 의자를 통해 김 대표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아니 토치의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구는 침대나 목재가구가 주였어요. 회전식 의자는 재래식 방법밖에 없었죠. 유럽에 다녀온 후 의자부품을 중점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94년 ‘무성’으로 법인을 전환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바로 의자 완성품을 했다면 시장선점의 효과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렇지만 기능을 갖춘 고품격 의자를 처음 시작했다는 자부심만큼은 저희가 갖고 있죠.”
귀국하자마자 의자부품을 개발, 공급하기 시작했다. 볼트, 너트, 나무, 천 외에는 전 품목을 개발해 의자공장에 공급했다. 국내에 없던 제품이라 선호도가 상당히 높았다. 
“전 품목을 개발했기 때문에 저희 부품을 공급받은 회사는 비닐하우스 안에서도 의자가 나올 수 있었어요. 베이스부터 중심부, 매카니즘까지 다 개발했죠. 모든 걸 의자에 쏟아 부었어요. 의자부품부터 하다 보니 동종업체가 생기기 시작했지요. 당시 무성 오리지널 의자는 10~20% 더 비쌌지만 일반 짜깁기 의자와는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제품력에 자신 있었죠.”
당시 전국 70군데 업체에 납품했다. 그러나 시설 투자가 많이 필요한 장치산업이다 보니 갈수록 회사가 어려워졌다. 
브랜드가 없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2001년 ‘토치’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본격적인 의자 완제품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의자 공급업체들이 나름대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 토치는 의자부품산업은 선구자였지만, 완성품 후발업체로 인식돼 시장을 확보해 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위기 딛고 재도약, 성장지표 구축 시작
 
토치는 현재 1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두바이,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러시아 등 다수 나라에 거래선을 확보하고 있다.
“한 때는 33개국에 수출하기도 했어요. 그동안 위기를 겪으면서 못 챙겼지요. 다시금 개척하려고 직접 나서는 중입니다. 앞으로 공격적인 영업과 해외수출전략으로 재도전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기업의 어려움을 통해 인재관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알게 됐다는 김 대표의 설명처럼 토치는 한 때 위기를 겪었다. IMF 당시에는 20억을 부도 맞았지만 대처를 잘해 고비를 잘 넘겼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그 이후에 찾아왔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규모가 커졌어요. 생산라인 확보를 위해 대구의 성서, 월배, 3공단지역 등 3곳에 각각 공장을 운영했죠. 공장이 각각 떨어져 있다 보니 관리 및 생산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겁니다.”
각각 떨어져 있는 생산라인을 한군데 모으기로 결정하고, 외곽에 부지를 마련해 사업체를 옮겨갔다. 당시 공장 한 동이 지금 전체공장보다 컸다. 그러나 덩치만 컸지 생각처럼 경영이 쉽지 않았다. 너무 외지에 있다 보니 리스크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인프라 구축이 안 된 곳이다 보니 기업경영에 여러 모로 어려움이 컸지요.”
한 때 200명까지 직원을 두었지만, 많아지는 인원에 비해 체계적인 인사전략을 세우기 어려웠다. 사람은 자꾸 바뀌고 숙련된 기술자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회사가 점점 어려워졌어요. 매년 손실금액이 엄청났지요. 2010년 즈음 전체적으로 점검을 해보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다시 도심으로 나와야겠다고 판단하고 임직원들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99%가 반대했어요. 그러나 제겐 앞으로의 길이 분명이 다가왔어요. 안되더라도 일단 나와서 해봐야 되겠다는 결심이 선거죠. 나오는데 6년이 걸렸어요. 이제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성장지표를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 중입니다.” 

 
신용이 자산, 그리고 사람이 보물
 
“최근까지 사업을 옮기는 데 집중하다보니 많은 부분들을 챙기지 못했어요. 그러나 열정과 끈기, 창조정신을 가지고 계속 변화해 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토치만의 남다른 경영노하우가 어느 회사보다 강점이니까요.”
모든 일은 사람이 중심이라는 김 대표, 신용이야말로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한다. 
“경영철학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신용을 첫 번째로 꼽습니다. 신용은 사람 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거지요. 신용을 잃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어집니다. 40년이 되도록 기업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신용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으면 끈기가 있고, 끈기가 있으면 창조정신이 발휘되죠. 창조정신을 갖고 있어야 미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직은 힘들지만 저 스스로 한 분야의 선구자이자 대한민국 애국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대한민국 제품의 품질을 급성장시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믿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은 주변에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한 때 서울에만 4개 영업소를 둘 정도로 전국 시장을 주도했던 토치. 토치를 취업하고 싶은 회사로 만드는 게 꿈이라는 김 대표. 
“앞으로의 계획은 영업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관리가 여의치 않아 지사 운영을 소홀히 했는데, 2016년 9월엔 서울지사를, 올 6월에는 부산지사를 다시 설립했습니다. 앞으로는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해요. 간섭이나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 그래야 활기있고 좋은 회사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글·사진_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