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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전통업소 지정된 대동공작소


끌 제작 115년

천안시 전통업소 지정된 대동공작소





115년 역사 가진 ‘끌 제작소’ 대동공작소 

끌. 참으로 익숙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낯선 공구. 저 먼 옛날, 청동기시대 조상들로부터 만들어져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익숙하게 사용되어 온 끌은 그러나 현재, 스마트폰과 각종 IT기기가 일상화된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어느 순간 낯설어져 버렸다. 청동기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10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끌은 그야말로 기본적인 공구였다. 사람 삶의 기본인 ‘의식주’에서 집(주)을 짓는 데 빠질 수 없고 빠져서도 안 됐던 공구가 바로 끌이다.
올해 천안시 전통업소로 지정된 대동공작소는 115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끌 제작소’다. 대동공작소의 끌 제작은 김원태 대표의 장인인 고 이종만 선생으로부터 시작해 2대에 걸쳐 115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 장인 어르신 시절엔, 그러니까 지금 백년공구거리라고 하는 종로 5가 공구상을 대동공작소가 지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 모든 수공구를 제작하고 명성 또한 자자했지. 우리나라 수공구의 기틀을 다졌다고나 할까.”
 
끌 제작, 그 어렵고도 험난한 길

끌을 제작하는 공정은 까다롭고도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한다. 손잡이만 해도 국산 참나무를 최소 3년씩 말려서 사용한다. 말린 나무를 전부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 고르고 버려 1/3남짓 사용할 수 있을 뿐. 거기에 손잡이의 뭉개짐을 방지하는 링 제작부터, 본격적인 몸체를 만들기 위해 강한 하이스강 철근을 자르고 붙여 성형하고 열처리해 마무리 연마하는 과정까지 수십, 수백 차례의 손길이 필요하다. 수많은 작업 과정 탓에 하루 종일 만들어도 완성되는 끌은 고작 해야 열 개 남짓. 어두침침한 대동공작소의 작업장에서 김원태 대표는 자신의 인생을 바쳐 끌을 제작하고 있지만 여유 있는 재고를 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인력 부족도의 큰 이유다. 대동공작소의 직원은 대표와 대표의 아들 김민규, 그리고 판매를 담당하는 대표의 부인 이현숙 셋이 전부다.
“기술자가 없어. 배우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수입품이 많이 들어오고 기계가 발전하다 보니까 사용처가 많이 줄어버린 탓이지. 요즘 누가 끌 만들려고 하겠어.”

 
100종류가 넘는 끌… 끌에 대한 모든 것

대동공작소의 끌 제작은 주문 후 제작을 기본으로 한다. 판매처가 줄어든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끌은 워낙 종류가 다양하고 한 종류의 끌에도 수십 가지의 각기 다른 부수(사이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끌은 일반 대장간에서 만드는 낫이나 호미와는 전혀 달라. 일반 대장간은 열처리하고 단조만 잘 하면 끝인데 우리는 그게 다가 아니거든. 강한 철과 약한 철을 접착하는 기술에 열처리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끌은 부수를 정확히 맞추는 게 핵심이지. 연마를 통해서 1mm까지 정확한 크기에 각도를 만들어 내는 거야.”
김 대표의 말에 따르면 ‘끌을 만드는 것을 10이라고 했을 때, 연마가 7’이라 한다. 일단 철을 다뤄 거친 끌이 나오면 네다섯 차례의 연마 공정이 뒤따른다. 자동화도 불가능한 것이, 기계로 두드려서만 나온 철은 다양한 사이즈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김 대표는 여러 종류의 연마석 앞에 앉아 완벽한 사이즈의 끌을 연마한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 모든 종류의 끌 제작이 가능한 끌 제작소는 대동공작소가 유일하다.


 
일본산보다 품질 좋은 끌… 전문가들은 알아 봐

우리나라 끌의 가격은 일본 등 다른나라 끌에 비해 무척 저렴한 편이다. 대표가 우연히 대마도에 가서 접한 일본의 막끌은 가격이 우리나라 끌에 비해 세 배가 넘었다. 하지만 가격이 저렴하다 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동공작소의 끌은 전문가들로부터 일본산 끌보다 더 높은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 가게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는 좋은 끌이 없는 줄 알고 일본 가서 많이 수입들을 해. 그런데 우리가 쇼핑몰에 올려서 좀 팔다 보니까, 써 본 사람들은 우리 끌이 일본 끌보다 낫다는 거야. 학교 교수 같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참 단순한 거지. 우리 대동공작소가 우리 장인어른부터 시작해서 나 그리고 우리 아들까지 3대를 이어 와서 100년 역사가 넘거든. 그런데 우리 물건이 인정을 못 받았으면 어떻게 100년을 살아남았겠어. 그리고 우리라도 제작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천년의 집 한옥을 공부하고 배우는 학생들도 우리나라 끌이 아니라 수입산 끌로 배워야 할 거야. 그만큼 많은 끌 제작소가 문을 닫았으니까. 지금 보면 돈이 문제가 아닌 거야.”
 
무형문화재와 명인들이 사용하는 대동공작소 끌

115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대동공작소. 그 역사와 기술력이면 나라로부터 ‘명인(名人)’혹은 ‘명장(名匠)’칭호를 받았을 법도 한데, 달고 있는 명칭은 올 해 6월에 소재지인 충청남도 천안시로부터 받은 ‘2016 천안시 전통업소’뿐이다. 그게 정말 아쉬운 부분이라는 것이 김원태 대표의 아들 김민규 씨의 말이다.
“근래 들어 창호 제작하는 분들이 명장 칭호를 많이 달았어요. 그 분들이 전부 다 저희 집 끌을 사용해서 창호 만든 분들이거든요. 사실 우리 끌이 없었으면 일 못하셨을 분들이에요. 처음 대동공작소 문을 연 저희 외할아버지 대에는, 끌에 대해서는 거의 우리나라 제패였어요. 끌 말고도 대패도 만들고 목공에 필요한 건 다 만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창호 하시던 분들은 우리 물건 안 쓴 사람이 없던 거에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사람들은 그 분들인 거죠. 우리는 인정 못 받고.”
각 지역의 전통업소와 무형문화재를 구분하는 직업군 90여 가지 가운데 ‘대장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천안시 전통업소 인증을 받은 것도 다 김민규 씨가 관공서를 쫓아다닌 결과다. 공구를 사용하는 사람은 세상의 인정을 받는데, 그가 실력을 뽐내기 위해 꼭 필요한 바로 그 공구를 제작하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공구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인지도 모르겠다.
끌 소비의 새 단골… 한옥학교와 한옥박람회

전통과 품질을 인정받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대동공작소의 끌은 IMF 무렵 김원태 대표에게 닥친 양손에 장애를 입을 정도의 사고로 타인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 과정에서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쌓아 뒀던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고 또 부도를 맞는 등 대동공작소에 수난의 시대가 닥쳐왔던 것이다. 끌 제작을 잠시 그만두고 공구 장사도 시작했던 김원태 대표였다. 하지만 전국에 한옥학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대동공작소의 끌 제작도 다시 시작됐다. 과거와는 달라진 요즘 끌의 주 판매처는 한옥학교다. 학교의 선생님들이 대동 끌의 품질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줘서 한옥학교 학생들에게 공급하는 등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올해에 서울시에서 주최한 제1회 한옥박람회에 초청받아서 출품한 적이 있어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더라고요. 특히 일본산 제품을 이용하거나 외제품을 사용해본 분들의 반응이 놀라웠어요. 일본산보다 더 좋은 국산 제품이 있는 줄 몰랐다는 거예요. 수입 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요.”
박람회 현장에서 만난 한 사람은 미국 현장에서 대동공작소의 끌로 작업하던 중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자랑까지 했다고 한다. 대동의 홍보 부족 등 많은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말이었다. 김민규 씨는 “제작과정이 힘들고 무척이나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가업을 잇는다는 인생의 과제보다도 명맥이 끊겨 남의나라 도구로 우리 고유의 수공구가 대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람”이라며 끌이란 소소한 수공구일 뿐이지만 그래도 용도에 맞게 아껴서 써 달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내년 2월, 2017한옥박람회에도 참가 예정이라는 대동공작소. 달라진 것은 주변의 환경만이 아니다. 대동공작소 자체도 변화해 나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인터넷 쇼핑몰의 개설이다. 아들 김민규 씨가 직접 제작해 오픈한 쇼핑몰을 통해서도 대동의 다양한 끌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일반 한옥용 끌보다 손을 더 가한 끌 ‘ACE천하’브랜드의 출시도 변화 중 하나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들이 두려워할 법한 새로운 변화를 마다하지 않는 대동공작소. 그들의 역사보다 미래가 더 궁금한 이유다.

글·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