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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집념’하나로 모든 것을 이루다




뜨거운 ‘집념’하나로 모든 것을 이루다


㈜리빙엔젤 (구 한일물산) 설립자 송준화 & 대표 송영근



1972년 조그마한 잡화상점으로 시작한 ㈜리빙엔젤은 1979년 사출공장을 신설하여 원예용품을 필두로 제조를 시작한 업체다. 제조를 시작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리빙엔젤은 원예용품, 청소용품, 철판열쇠, 매트용품, 옷걸이류 등 60여가지 이상의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탄탄한 제조업체로 거듭났다. 그래서 중국이나 제 3국의 저가제품이 시장을 장악한 지금도 ㈜리빙엔젤은 제조업의 본분을 지키며 Made in Korea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작은 잡화상점이 탄탄한 중소 제조기업이 되기까지 ㈜리빙엔젤의 성장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한 손으로 이룩한 성공신화

1972년 시작된 리빙엔젤의 창립자는 리빙엔젤의 현 대표인 송영근씨의 아버지 송준화씨다. 송준화씨의 인생역경은 남다른데 성치 않은 몸으로 사업을 시작해 남부럽지 않게 사업을 키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 때 불의의 사고로 송준화씨는 한쪽 손을 잃는다. 시퍼런 20살 청춘에 장애를 가지게 된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세상에 대한 원망도 정말 많이 했다고 한다.
"제가 사업을 하게 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몸이 이 모양이라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기가 어려웠으니까요.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자식을 낳기 전까지 세상에 대한 원망이 참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제가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해야 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고생이란 고생을 워낙 많이 했죠. 그런데 오른손까지 잃게 되니 정말로 세상 살기 싫었어요. 세상을 참 많이 미워했지요. 살아갈 자신도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정신이 번쩍들더군요. 세상사는 건 원망하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게 아니었어요. 내 아내와 자식을 배고프지 않게 하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이더군요. 그길로 자전거를 배우고 잡화점을 시작했지요. 성치 않은 몸이라 자전거 운전도 쉽지 않았습니다. 손 하나가 없으니 자꾸만 넘어졌지요. 하지만 노력해서 안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시작한 잡화점이 바로 이 리빙엔젤의 시초 입니다."
세상을 비관하던 사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은 후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거친 세상 가족을 보호하며 잘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잡화점. 그것이 리빙엔젤의 시초였다.



작은 변화가 미래를 바꾼다


"처음에는 자전거 하나를 구해 약국이나 약제상이 필요로 하는 병원 용품을 취급하는 일을 했죠. 커다란 광주리 몇 개를 자전거에 싣고 사업자 등록을 내어 사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솜이나 붕대, 거즈나 안대를 구해 약국에 팔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배달을 하다 보니 약국에서는 약품을 파는데 제대로 만든 분무기가 없더군요. 순간 분무기가 사업아이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송준화씨는 그 길로 금형 외주를 주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농약 분무기 제작을 시작한다. 작은 잡화상점 가게가 제조를 하는 공장으로 변신을 한 것. 외주를 주어 제작한 분무기 부품들을 가정집에서 조립하고 자전거로 배달하여 거래처에 납품하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이 송준화씨의 미래를 바꾸게 된다. 그런데 송준화씨가 제작한 농약 분무기가 순조롭게 판매하던 중 타업체의 덤핑공세로 고전을 했다. 그 위기를 송준화씨는 다품종 사계절 제품 개발 만이 살 길이라 생각해 새로운 제품을 제작한다.
“농약 분무기가 상당한 호평을 받았지요. 당시에는 제대로 된 농약 분무기가 없었거든요. 전국의 농약방에서 분무기 주문을 받아 물건을 부쳐주고 그렇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농약 분무기는 3월부터 7월까지만 제품이 팔려요. 가을과 겨울에는 주문이 뚝 떨어집니다. 농약 칠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러면 안되겠다 제품 구색을 더욱 더 맞춰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서 또 나온 것이 플라스틱 옷걸이입니다.”
그렇게 리빙엔젤은 차근 차근 제조업으로 변신을 하게 된다. 1972년 장사를 시작하고 1년 후 가내 수공업 수준의 공장을 하다 1979년에는 사출기계를 마련한다.
“사출성형을 시작 한 겁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장 제조업을 했습니다. 79년도부터는 아예 공장을 차려 제조를 전문적으로 시작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제대로 된 공장은 없고 외주만 해서 단독주택에 천막을 치고 동네 아주머니를 불러 제품 조립을 하던 수준이었어요."


기술를 키우고 특허를 잡아라

우리가 쓰는 식칼 중에 몸통 중간 중간 구멍이 나거나 옆이 볼록하게 나온 제품이 있다. 음식 재료를 썰 때 칼과 재료가 물기로 달라붙지 않는 제품들. 그런데 이 제품들은 송준화 대표의 아이디어로 나온 제품이다.
“처음 제품을 만들고 특허를 받았어요. 그런데 부산의 ‘동원금속’이라는 업체에서 로얄티를 지불 할 테니 특허를 빌려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 다른 사업으로 많이 바빠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특허에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사업에 바쁘다 보니 서류상의 미비로 특허 만료가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제품을 제작하게 된거죠. 이 외에도 특허 관련 소송도 있었고 그때 공부를 참 많이 했습니다. 제품을 개발하면 실용신안을 받아야 해요. 또 특허를 받았다고 해서 특허를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특허는 운전면허증 같다고 할까요. 제품을 개발하면서 특허싸움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변리사 책을 사서 공부해 항소장 같은 것을 써가며 사업을 경영해야 했어요.재판에서 판사님이 그러더군요. 송준화씨 재판 이기고 싶냐고. 그럼 공부를 해야 한다. 상대가 걸어오는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고. 또 옳은 증거 확보를 해야 한다고. 법 없이 사는 사람은 법이 보호를 안한다고. 그래서 공부를 했죠.”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어렵게 경영을 하면서도 위기는 몇 차례 있었다. 공장에서 사고가 난 것. 직원이 기계 작동을 미숙하게 하여 손을 다친 것이다. 직원 치료비에 보상금에 의수를 만들어주고 그렇게 하니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실패를 하니 좌절을 많이 느꼈죠. 83년도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어요. 그래서 나온게 구멍이 2개인 농약 분무기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제품 의장등록을 하고 금형비가 없어서 각 거래처를 돌아다니며 투자를 받았죠. 그렇게 금형비라던지 초기 사업자금을 받아 다시 재기를 했어요. 대신 분무기를 각 지역의 거래처에 독점 사업권을 주었습니다.”
제품 의장등록 하나로 다시금 일어서게 된 것은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자는 신념이 만든 결과다. 또한 평소에 최선을 다해 경영을 하고 거래처에 신용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 였다.



영업 하나로 서울로 진출

그렇게 몇 년간 성장하던 리빙엔젤은 1992년부터 정체기를 갖게 된다. 사업이 잘 안되었던 것. 고민하던 송준화씨는 서울로 진출을 한다.
“일단 제품을 만들었는데 물건이 더는 잘 팔리지 않았던 거예요. 아무래도 다른 업체에서 비슷한 제품을 생산을 하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서울로 진출하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물건에 대한 자신은 있어 서울 각 지역의 철물점에 찾아가 직접 영업을 하고 그랬어요. 위기를 다시 영업으로 극복 한 거죠.”
그러나 영업 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주위에서는 지방에서 서울로 가서 성공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만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송준화씨는 되려 오천만원을 투자하여 서울에 사무실을 세우고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
“그때 제가 자식 셋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오천만원을 투자하여 서울로 진출하였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실패하더라도 오천만원 손해 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 영업소의 매출증가에 힘입어 잘나가던 사업이 IMF 때문에 97년 또 한번의 시련으로 완전히 또 망했죠. 또 다시 역경의 세월을 집념 하나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리빙엔젤을 이끄는 송영근 대표

IMF이후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한 리빙엔젤은 2000년에 들어오면서 송준화씨의 아들인 송영근씨가 대표직을 맡게 된다.
“계속 왼손만 쓰니 몸이 많이 불편하죠. 뼈주사를 3개월에 한 번 씩 맞으며 사업을 했죠. 자식이 장성하여 사업을 접으려고 했는데 아들이 한번 해보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더욱 제조를 하는데 더욱 구색을 갖추었어요. 또 아들인 송영근 대표가 열심히 하고 잘 하고 있어요. 작년에 갑상선 암 수술을 받으면서 이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넘겼죠.”
지금도 송영근 대표는 경리업무와 배달을 다 한다. 신제품을 내고 디자인을 생각하고 팔방미인이 다 된 것. 송영근 대표의 말을 들어보았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죠. 해도 될 일을 선택을 잘해서 집중을 한 것이 강점 아닐까 합니다. 저도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위험하다 싶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중국산이 강세를 띄었지만 지금은 중국산보다 국산을 고집하는 분들이 많아요. 중국산 품질 문제와 더불어 출하량 조절이 안되는데 저희는 항상 꾸준하게 적정재고를 유지하고 물건을 판매한다는 것이 강점이죠. 지금 현재 리빙엔젤은 영업은 안하지만 배달 납품, 경리, 회계를 제가 다합니다. 그게 또 강점이 아닐까요? 시장조사는 전국 총판이나 대리점 사장님을 만나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알아내고요. 저희는 그렇게 시장이 필요한 제품을 잡아 제조를 하죠. 금형을 제작하는 기술력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물건이 하나 있으면 어떤 물건도 만들 수가 있죠.”
송준화씨는 6살 때부터 했던 고생이 자신의 밑거름이라고 말한다. 항상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 못할게 없다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강한 집념을 가지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송준화씨와 그의 든든한 아들인 송영근 대표가 있는 리빙엔젤은 앞으로도 강한 제조기업으로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