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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수출하는 스프링 생산업체




해외로 수출하는 스프링 생산업체

(주)코아씨앤티 김천두 대표



스프링은 산업 전반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는 가장 필수적인 기초부품이다. 폭넓게 사용되기에 소비자의 주문에 따라 생산되는 스프링의 종류는 무한하다. 이런 산업의 가장 기초적인 부품인 스프링을 생산하는 한국 업체가 바로 (주)코아씨앤티다.
(주)코아씨앤티는 1989년 6월 설립되어 금형용 사각스프링과 기타 정밀 스프링을 생산하고 있는 업체. 그동안 꾸준한 연구개발과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최고의 품질, 최고의 가격, 최단의 납기를 지켜내는 것으로 유명한 업체이기도 하다. 이제는 국내를 뛰어넘어 중국과 홍콩 인도네시아로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 ‘Made in Korea’ 스프링을 세계에 알리는 (주)코아씨앤티를 찾아가 보았다.


CEO의 다양한 경험이 회사 원동력


(주)코아씨앤티의 CEO 김천두 대표는 스프링 제조업에 뛰어들기 전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이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스프링 생산을 하기 전에 다른 사업을 했어요. 저는 20대 초반부터 컴퓨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예측을 했거든요. 그래서 컴퓨터 사업을 27살에 하기도 했죠. 그전에는 직장생활과 군 생활을 했었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군대에서 3년을 보내고 백화점에서 외판을 했습니다. 영업에 대해서 알고 싶었거든요. 84년도 말에 백화점에서 영업하는데 그때 당시 대기업 사원 수준의 월급을 받으면서 영업을 했죠. 그때 영업을 제대로 배웠어요.”
당시에는 일반 시장에서 계산서도 제때 발행하지 않을 때다. 김천두 대표는 백화점에서 외판 하는 법을 폭넓게 배우게 된다. 그 이후 제약회사에 들어가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김천두 대표는 컴퓨터 교육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는 말이거든요. 저는 저 나름대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면서 20대를 보내었어요. 내가 고학력자가 아니니 나 같은 보편적인 사람은 직장생활로 성공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사업에 뛰어들었죠."
그 당시는 컴퓨터 보급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김천두 대표는 일하며 틈틈이 컴퓨터 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이후 컴퓨터 학원을 차렸으나 컴퓨터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실패를 하게 된다. 학원을 세운 지 1년이 지나자 가르치는 데 사용하는 컴퓨터가 다 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영업으로 매출 확보


한차례 사업 실패 이후 김천두 대표는 고교 시절 친구의 소개로 스프링 제조를 알게 된다.
“친구들이 스프링 제조 공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우리 회사와 경쟁하는 ‘삼설’이라는 업체도 사실 내 고등학교 친구가 하는 회사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주 스프링 공장에 놀러 갔고. 또 스프링 공장을 보면서 수익구조를 분석할 기회도 있었어요. 제조과정도 볼 수 있었고요. 보니까 수익성이 좋은 거예요. 원가가 적게 먹히고 이익이 많이 발생하는 거죠. 또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가 무척 활황이었잖아요. 대략 그때 제품 하나에 1,000원짜리를 만들면 원가 비중이 80원이었어요. 그래서 스프링 제조에 뛰어들게 되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마진율이 높은데 기존의 스프링을 제조하던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장사만 하는 거예요. 다른 비즈니스도 없이 사러오면 팔고 안 오면 안 팔고. 능동적이질 못했죠. 그래서 저는 영업을 강화해서 사업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앉아서 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찾아가 영업을 통해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과거 영업사원으로 일한 경험이 빛을 보는 순간이다. 더군다나 스프링 제조업은 다른 업종에 비해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다르죠.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업체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주는 기술력을 갖추어야 하거든요. 더군다나 지금 사업 상황은 과거와 많이 달라요. 이제는 1,000원 팔면 80원 남죠. 1,000원 팔면 920원 남던 때와는 다릅니다. 그때라서 쉽게 달려들었지, 지금은 힘들죠.”


모든 이익은 기술개발과 설비투자로


사실 어찌 보면 (주)코아씨앤티는 후발주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후발주자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김천두 대표는 많은 노력을 한다.
“처음에는 정밀한 것을 못 만들었죠. 그래서 누구나 그렇듯 기초적인 제품을 제작으로 시작했습니다. 못 만드는 제품은 위탁을 했고요. 제조와 딜러 형태가 합쳐진 걸로 보시면 됩니다. 위탁가공을 해서 납품을 하고 대금회수를 해서 결제를 한 것이죠. 그러다 이익금이 나면 무조건 설비투자를 했어요. 그렇게 기계가 한 대씩 한 대씩 늘어났습니다. 초창기 때에는 회사를 키우는 데 주력 했어요. 그래서 집에는 최소 생활비만 주어야 했죠. 일단 회사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만큼 (주)코아씨앤티는 기술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었고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눈물짓게 하면서 웃음도 준 IMF


결국 (주)코아씨앤티는 지속적인 성장 덕에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자가 공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주)코아씨앤티는 IMF 위기를 겪는다.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공장을 설립한 돈이 원화로 표시된 외환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돈으로 빌려 공장을 세웠는데 그 돈은 원래 차관이었습니다. 그래서 환율이 오르니까. 덩달아 갚아야 할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예요. 제가 원래 1달러당 원화가 800원일 때 빌렸던 돈이 1,800원까지 되니까 갚아야 할 돈이 2배로 늘어나지 않습니까. 참다가 도저히 공장 유지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공장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더불어 설비는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IMF로 인한 환율급등은 외산 스프링 가격을 크게 올린다. 국산 스프링을 외면하던 기업들이 가격이 너무 비싸 외산을 쓰고 싶어도 못쓰게 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때 또 크게 성장을 했습니다. 납품처라는 곳이 한번 바뀌면 또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거든요. 스프링 품질은 외산이나 국산이나 크게 차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환율 때문에 대기업도 어쩔 수 없이 국산을 썼지만 사용해 보니 큰 차이가 나지 않잖아요. 그러니 주문을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죠. IMF가 공장을 뺏어 갔지만, 거래처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내평정 이후 해외로


IMF 이후 (주)코아씨앤티는 국내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IMF 이후 와신상담한 결과다. 국내 시장 점유율을 높이자 국외 시장을 염두하고 둬서 수출을 시도한다.
“회사는 계속해서 확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출이 늘고 사세가 확장해야 희망이 보이는 거죠. 국내에 점유율은 높일 대로 높였다고 생각이 들자 국외로 눈이 돌아가더군요. 자연스럽게요. 국내시장은 더 커질 생각이 없으니 중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에 중국시장이 개방되면서 중국에 진출하여 공장을 세우는 것이 나을까 고려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장성을 가늠했었죠. 그때 내린 결론이 ‘공장은 한국에 그대로 유지하되 중국에 물건을 수출하자’였습니다. 그때 당시는 중국 시장이 좋았지만, 나중에 되면 오히려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품질에 이상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실제로 다른 업종의 중국에 진출한 기업 중 재미 본 기업은 별로 없죠.
오히려 덕분에 중국에 스프링 제조 기술을 뺏기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주)코아씨앤티는 경기도 이천의 공장에 터를 잡고 제품을 생산하여 중국과 홍콩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고 있다. (주)코아씨앤티는 1,000평이 넘는 부지에서 다양한 스프링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된다. 처음 사무실 한 칸에서 시작한 것에 비해 눈부신 발전을 한 셈.
“코아씨앤티의 힘은 아마도 20년이 넘게 스프링을 생산하면서 거의 모든 스프링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기술력은 회사에 오래 근무한 직원분들 덕분이죠. 그래서 앞으로는 직원 복지나 대우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한국의 스프링 제조기술을 지키면서 국외에도 수출을 지속해서 추진하는 (주)코아씨앤티의 발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