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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장 일군 - 태양파워(주)
IMF시절 이기고 중국공장 일궈 콘크리트 드릴에서 방독면까지
태양파워㈜
열정적이다. 타고났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 태양파워란 이름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대한민국 산업공구의 역사를 만들어온 박극우 대표를 만났다.
지하수 뚫는 시추기 제작으로 종잣돈 마련
남다른 손재주를 가진 덕에 비트, 파이프나사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 생산하고 수리를 하며 사업을 이어갔다. 지하수를 뚫는 시추기도 만들었다. 다른 이가 만드는 걸 눈대중으로 봐놨다가 실제로 제작해서 판매까지 한 것. 당시 가뭄이 심한 까닭에 농민들에게 융자지원이 많이 됐다. 덕분에 기계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기계를 만들어놓기만 하면 팔렸어요. 5~7월 2달간 당시 돈으로 천만원 정도 벌었으니까요. 그게 종자돈이 돼서 제대로 된 공장을 시작할 수 있게 됐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업이 안됐어요. 내게 맞는 아이템을 찾았는데, 바로 목공기계였어요. 자동대패기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납품활로를 뚫어 판매했어요. 그러던 1978년 2차 오일쇼크가 온 거예요.”
콘크리트 드릴 첫 국산화 이뤄
큰 어려움 속에 귀한 인연도 만났다. 어려운 시절 목공기계를 다 사주었던 동대문 목공기계상 사장님 뿐만 아니라 장구공사 정병모 회장은 대한민국 산업공구 현장을 함께 이끌어온 동지나 다름없다.
“어느 날 청계천에 나가보니 콘크리트 드릴을 전량 수입해 판매하는 걸 봤어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죠. 어떻게 하면 국산화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됐어요. 당시 인기 수입제품을 사서 책상에 놓고 어떤 재료가 필요할지, 어떤 공정이 되어야 하는가를 머리에 그렸어요. 그리고 1년 반쯤 지난 무렵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죠. 신제품을 가지고 판매상을 찾았더니 저울로 달아 산다고 하더라고요. 국산이라고 하니 믿지도 않을뿐더러 무시한 거죠. 그게 시초였어요. 콘크리트 드릴 국산제품이 1982년 태양파워의 이름으로 처음 출시된 거예요. 제품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잘 팔렸어요. 80년대 중반 전국투어 중 최영수 회장님을 만나 우리 제품이 전국에 유통되는 계기가 된 것도 큰 힘이 됐지요.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어요.”
반월공단에 땅 800평을 마련해 공장도 짓고 종업원도 40명까지 늘렸다. 중소기업으로 모양새도 갖추고 기계도 100대나 들였다. 그러나 94년부터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IMF사태 당시에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말 그대로 혼돈의 시대였지만, 그동안 뚝심있게 해오던 알찬 경영이 진가를 발휘해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야간대학과 야간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 학업에도 열정을 더했다.
IMF시련 이기며 중국공장 설립
IMF 이후 중국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정병모 회장과 몇 년간 다니며 땅도 사놨다. 공항과 불과 15분 거리 중국 청도에 4천 평 대지에 약 천 평 규모의 공장도 지었다.
“나름대로는 제2의 도약을 꿈꾼 것이죠. 중국내 전시회란 전시회는 다 참가하고, 중국시장 개척을 시도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처음 중국투자기업에 대한 면세혜택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부과된 세금도 엄청 났죠. 결국 배로 실어간 기계를 내리지도 못하고 항구에 석달 반 동안 묶여있기도 했어요. 어려움 끝에 겨우 기계를 옮겼는데, 녹이 슬어 온통 빨갛게 되어 있더라고요. 기계 녹을 닦는 데만 한 달 걸렸어요. 거기다 한국보다 두 배나 높게 나오는 전기요금 때문에도 애를 먹었고요. 알고 보니 가장 비싼 요금제를 적용시켰더라고요. 통역문제도 있었고요. 나중에 이를 해결해준 사람이 지금 제 사위가 됐죠.”
사위가 중국공장을 맡게 되면서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글로벌경영체제가 갖춰지게 됐다. 공장이 중국에 있지만 배가 이틀에 한 번씩 운행하는 등 물류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필요한 물건은 바로 공급받고 있다고.
로터리 바 최초 국산화 성공, 끊임없는 아이디어 실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콘크리트 드릴 전문 브랜드로 태양파워의 입지를 굳혀온 만큼 늘 새로운 아이템 개발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 아이템이 영원하지 않아요. 간이 방독면과 친환경 펠릿난로를 개발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에요. 각 지역에서 제품 개발 주문도 많이 들어와요. 우리는 성공해줄 거라 믿고 새벽기차 타고도 오시고요. 각 업체들의 주문사항에 맞게끔 개발한 것 포함해서 지금까지 개발한 걸 꼽으라면 아마 천 가지도 넘을 겁니다. 앞으로도 아이템은 무궁무진해요. 계속 개발해 나가야죠. 새로운 걸 개발하고 제조해나가는 과정만큼 큰 희열이 없어요.”
로터리 바를 최초 개발해 국산화에 성공한 것은 물론 ‘제10회 산학협동 산업기술대전’에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간이 방독면과 친환경 난로 로 사업 다각화
최근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참 안타까웠다는 박 대표.
“화재가 나면 대부분 연기 때문에 피해가 커집니다. 화재가 나면 소화기로 끄기보다 우선 대피하는 게 중요해요. 그 황금시간동안 사람의 몸을 지켜줄 도구가 필요하죠. 저희가 개발한 간이 방독면은 페인트 작업장이나 연기, 가스작업장 뿐만 아니라 각종 화재나 지하철 사고에 대비해 평소 휴대용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청계천에서, 전시회에서 또는 일상에서 느끼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상용화하는 박 대표의 순발력이 최근 또 발휘된 것. 캠핑 갔다가 난로를 사용해본 박 대표에게 새로운 제품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다.
“캠핑 가보니 난로에서 발생되는 연기가 좋지 않더라고요. 놀러 와서 연기마시고 가면 안 되잖아요.(웃음) 연기가 안 나는 친환경제품을 개발해 캠핑 전문기업에 제출했지요. 협력업체로 합격해 금년가을부터 납품하게 됐어요.”
직원들에겐 업무의 자율권을, 품질관리는 철저하게
늘 새로운 걸 시도하는 만큼 품질관리는 더욱 철저하다.
“직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게 바로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생산시스템이 자동화라인인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 있는 직원들이 자신의 몫을 찾아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직장문화를 만들어가는 거죠. 저는 그저 가끔 간섭하거나 참견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강조하는 건 바로 품질관리입니다. 저희들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바로 불량제품 골라내는 일이예요. 거래처에서 급하게 요청오는 것은 즉각 대처하고요. 철저히 검사하고 신속히 납품하는 것, 그게 저희들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협회관 건립에 1천만원 쾌척, 218쌍 결혼식 개최 통큰 기부
박 대표가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놓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사회봉사활동이다.
“제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여전히 건강하게 사업하며 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해온 봉사활동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어린이보호시설이나 장애인분들 돕는 것은 물론 청소년 선도역할도 하고 JC나 로타리클럽 회장도 역임하면서 소외받는 분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어요. 선거활동도 해보고요. 1987년에는 218쌍의 합동결혼식을 개최해 TV생중계까지 나갔으니까요. 지금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역과 사회를 돌보는 일에 힘이 닿는 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그는 ‘열정’이 즐거운 삶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완벽하진 않지만 바로 실행하는 추진력이 지금까지 그의 삶을 이끌어온 것이다. 이는 비단 사업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용재협회에 협회관 건립을 위해 1천만원을 선뜻 기부한 것.
“지금까지 제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준 건 모두 협회분들 덕분입니다. 저희 제품을 유통해주신 덕분에 잘 살아왔고, 또 자식 키우고 사회활동도 했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사회활동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협회에 관심을 많이 두지 못한 게 오히려 죄송스럽습니다. 지금이나마 제가 필요하다면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부도 하고, 유진기업반대 시위에도 참여했어요.”
판매전략에 있어서도 거래처에 대한 파트너십이 빛을 발한다.
“한 때는 한 달에 몇 번 지방에 다니며 거래처를 찾아다닌 적도 있어요. 그러나 거래처를 늘리기보다 현재 거래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태양파워의 물건을 유통해주시 는 사장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거래처에서 조그마한 행사라도 하면 적은 비용이라도 성의를 표하기도 하고요. 그게 사는 거 아니겠어요? 비록 생산공장은 중국에 있지만 한국인의 정신으로 한국사람의 요구에 맞는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계속 공급할 계획입니다. 40년 넘게 공구업계에서 동고동락해 온 만큼 남은 인생도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글·사진 _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