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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공구와 인생] 모든 삶은 Do It Yourself


모든 삶은

Do It Yourself





우리 삶에 필요한 통조림, 인문학 + DIY

가히 인문학의 열풍이다. 서점에는 인문학 관련 서적이 쌓여 있고 사람들은 갈증을 해소하듯 책을 읽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열풍이 있다. 바로 ‘DIY’다. 얼핏 보면 인문학과 DIY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하버드대 교수인 스탠리 밀그램이 1976년에 발표한 ‘6단계 분리이론’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여섯 단계만 거치면 누구와도 연결된다. 나도 여섯 단계만 거치면 미국 대통령 오바마나 어릴 적 책받침에서나 봤던 소피마르소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럼 인문학과 DIY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아니 우리는 왜 지금 이 시대에 인문학과 DIY에 열광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불안한 현실일 것이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중심을 잡아야만 한다. 확실한 시대정신이나 가치관이 있다면 거기에라도 기대 볼 텐데, 현재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럼 스스로 자신을 정립해 줄 철학이나 사상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인문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DIY도 마찬가지이다. DIY는 ‘Do it yourself.’ 즉 ‘네 스스로 직접 만들어라.’라는 뜻이다. DIY가 나온 배경도 불안한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DIY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제 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부터이다. 전쟁이 끝나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 DIY가 요즘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넓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가구를 만드는 일, 가죽 공예를 하는 일, 아니면 스스로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것도 DIY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인문학과 DIY의 열풍은 그런 면에서 닮아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무언가에 의지해서만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불안하다. 그나마 믿고 의지할 존재는 자신 스스로뿐이다. 그렇다면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생각이든 목공이든, 어떤 기술이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프레퍼족일지도 모른다. 프레퍼족이란 스스로 재난을 대비하는 사람을 말한다. 비록 열성적인 프레퍼족처럼 대피용 벙커를 만들진 않아도 우리는 삶에 필요한 통조림 몇 개는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인문학이고 DIY인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뭔가를 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희열도 있지 않는가? 세상에 대한 불안과 발견에 대한 기쁨이 인문학과 DIY에는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하나로 살 수 없다.

 
 

자연과 인공, 나무와 공구 사이에서

인문학과 DIY, 특히 목공은 어떤 점이 닮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것에서부터 인문학과 DIY는 닮았다. 자. 목공의 두 축은 나무와 공구이다. 그 사이에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공구를 가지고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일이 목공이다.
나무는 자연이고 공구는 인공이다. 그럼 가구를 만드는 사람은 나무라는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공구라는 인공으로부터 배울게 생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다. 나무는 나무가 가진 성질이 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빨리 자라기도 하고 더디 자라기도 한다. 나무에서 햇빛과 양분이 풍부한 봄과 여름에 자란 부분을 춘재라 하고 가을에 자란 부분을 추재라 한다. 춘재는 빨리 자라지만 무르다. 반대로 추재는 더디 자라지만 단단하다. 이것이 나무의 이치이다.
자연에는 억지가 없다. 그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바꾸어 나간다. 억지가 없기에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라는 말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공구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의 기구이다. 사람은 추우면 따뜻하게 만들려 한다. 더우면 시원하게 만들려 한다. 나무가 마냥 바람을 맞는 것과 달리 집을 지어 비와 바람을 막는다. 이는 사람은 의지이고 그 의지를 표현하게 하는 것이 공구이다.
하지만 사람의 의지는 또 제어되고 억제되어야 한다. 끌을 잘 못 쓰면 손가락을 베고, 테이블 톱이나 루터 테이블을 부주의하게 다루면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때문에 사람이 공구를 다룰 때는 조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바로 해야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 삶의 가치관이 그러하다. 이것은 타카가 나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이 공구에서 배우는 사람의 일이다.
공구를 가지고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일,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우리는 자연과 인공의 중간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으로 말하면 자연은 도가적이고 인공은 또 유가적이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는 인위를 배격하고 자연의 이치를 따르라 한다. 반대로 공자와 맹자로 유명한 유가는 사람의 도리를 가르친다. 우리에게는 도가와 유가 둘 모두가 필요하다. 이는 사람이 차가운 이성이나 따뜻한 감성만으로 살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자연과 인공, 감성과 이성, 나무와 공구 사이에서 사람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과 DIY가 가진 또 다른 공통점이다.
 

목공으로 같은 사물 다르게 보여

우리의 주위에는 수많은 것들이 놓여 있다. 그것들을 아무 의미 없이 보면 그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 버린다. 하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의미 있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목공에 아무 관심이 없을 때, 나무는 땔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공을 하게 되니 길 가에 버려진 나무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길 가를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내게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젊었을 적 첫사랑이었다면 어떨까? 그 사람은 더 이상 길가를 스치고 지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사물의 의미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서 정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1단계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것을 다시 만났을 때, 느껴지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그 존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일상의 현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내는 일이다. 가장 좋은 예가 뉴턴의 사과일 것이다.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 한 둘 이겠는가? 수 천 년 동안 사과는 그렇게 떨어졌는데, 왜 뉴턴만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뉴턴이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 생각과 사고의 폭을 넓혔기 때문이다.
물이라는 자연의 사물이 있다. 이 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할 수 있다. 중국의 맹자는 본래 인간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그런데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고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고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했다. 이 둘이 논쟁을 펼치는 데, 그 근거로 든 것이 바로 물이다.
고자의 말을 거칠게 표현하면 ‘아니 물이라는 것이 서쪽으로 방향을 터주면 서쪽으로 가고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가는 것인데 어찌 방향이 있느냐? 인간의 본성도 정해진 방향이 없는 거 아니냐’ 정도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그럼 물은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르냐?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똑같은 물의 모습을 보고 맹자와 고자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친 것이다. 물론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위의 펼쳐진 모든 사물이 내게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공구에서도 얼마든지 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은 노자의 물 이야기로 끝내 보자.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거할 때는 낮은 땅을 좋아하고 마음을 쓸 때는 깊이 있기를 좋아하고, 사귐에는 어짊을 좋아 하고, 말에는 믿음이 있으며, 다스림은 바로 하고 일은 능하며 움직임에는 때를 맞춘다. 대저 다툼이 없으니 허물이 없다.’

똑같은 물을 보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 우리가 보는 사물에서도 다른 면을 한 번 발견해보자. 누가 아는가? 세상이 정말 달라 보일지 말이다.

글 _ 임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