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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공병호의 경영 한 수] 안될 일도 되게하는 '관점 바꾸기'





안될 일도 되게하는 '관점 바꾸기'


세상이 ‘컴컴하고 기회의 문이 꼭꼭 닫힌 곳’이라 생각하게 되면, 당신을 둘러싼 현실은 정말 그렇게 바뀌고 만다. 완전히 반대로 바라볼 수도 있다. 마치 세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곳’이라 생각한다면, 언제든 당신에게 기회의 문이 열린다. 기회를 찾아내는 것은 내 자신의 몫이다.



성공은 행운인가 노력인가

책을 읽다가 한 유명 작가의 책 속에서 관점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다. 여러분은 이 내용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잠시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난 성공의 대부분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알고 있는 ‘성공 내러티브(이야기)’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서 성공했다는 식의 내러티브는 낡은 산업시대의 레퍼토리다. 세상에는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노력=성공’과는 또 다른 방식의 성공 내러티브가 가능해야 선진국이다.” -김정운, <에디톨로지>, 21세기북스, p.53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행운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작가의 생각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좀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 이야기도 하나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지인 가운데 20년 넘게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경력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 번은 그와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행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행운조차도 상당 부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내 경험을 미루어 보면 어떤 일을 계속해서 집요하게 추진하다 보면 운조차도 자기중심으로 끌려 들어오는 것 같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업에서 활동해 오면서 내가 갖게 된 생각이네.”
이런 말을 전해준 지인은 단 한 번도 관점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자신이 행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걸음 나아가 세상살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분명히 드러낸 셈이다. 운을 스스로 통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그는 위의 작가와 전혀 다른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령대도 비슷하고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대학교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도 관점에 따라 달라

관점은 행운에 관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따금 우리는 예상치 못한 황당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출해 낼 수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이때 불의의 사건 사고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지난 해 7월 1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떠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행하던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미사일을 맞고 추락한 사고가 있었다. 탑승자 298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가운데 네덜란드인이 196명으로 가장 많았다. 얼마나 엄청난 비극이고 억울한 일인가. 그 사건이 났을 때 네덜란드의 중견 소설가 아르넌 그룬버그(43)는 뉴욕타임즈에 ‘집단적 슬픔의 문제점’이란 글을 기고한 바가 있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교회가 조정을 울렸고 국민은 1분간 묵념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곧 비극에서 벗어나 본래 삶으로 복귀했다. 국가 애도, 공식 애도는 허울일 뿐, 삶은 계속됐다.”
나는 비극적 사건을 대처하는 네덜란드인을 통해서 관점을 생각하였다. 이들은 유럽인들 가운데서도 합리적인 민족성으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작은 나라임에도 한 때 전 세계의 무역을 지배할 정도로 국운을 떨쳤던 네덜란드인은 근검절약, 합리주의, 실용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주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죽음, 한 걸음 나아가 사건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신들만의 관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사건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사건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개인 차원에서 애도해야 하지만 이를 집단 전체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다소 생경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구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비극적인 죽음이라 하더라도 삶의 불가피한 면에서 받아들이는 점에는 그들이 좀더 ‘쿨(냉정한)’한 점이 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처럼 민족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다 혹은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차이에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혹은 관점이 녹아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척박한 바다환경, 관점 바꾸니 자립정신 우뚝

오늘날은 상대주의의 시대이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틀린 것도 없다고 은연중에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바른 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올바른 관점일까? 이를 판단하는 데는 심오한 학문이나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를 뛰어넘어서 부모가 자식들에게 간절히 가르치고 싶은 것들에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도의 작은 소도시에 자랐다. 수산업을 영위했던 아버지의 삶은 롤러코스터처럼 널뛰기를 계속했다. 바다를 상대로 하는 사업은 항상 아슬아슬하다. 사람도 제법 죽어 나간다. 그물에 걸려 죽는 사람도 있고 저녁에 술이 취해 실족해서 죽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별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알려주셨다. 누가 당신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가 돼서야 이것이 바로 ‘자립자존’의 정신이고, 이러한 정신으로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운명도 성공도 ‘공짜’는 없다

세상의 어느 부모도 남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가라고 권하지 않는다. 때문에 스스로 세상에 우뚝 서서 자신의 손과 발과 두뇌로 살아가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가치이자 관점이다. 이따금 정치인들은 공짜로 무엇을 해 주겠다는 약속을 수없이 한다. 그 때마다 나는 부모로부터 무엇을 배웠고,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가를 상기해 본다. 그 가르침에는 ‘공짜’가 없다. 공짜를 바라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않았고 내 자신도 아이들에게 누군가로부터 공짜를 얻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운도 마찬가지다. 성공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배우지 않았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운이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노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운명과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귀하게 사용해야 한다. 관점이 흔들리면 삶은 온통 뒤죽박죽 될 뿐만 아니라 어두컴컴한 곳으로 변질되고 만다. 좋은 관점을 갖는 일이야말로 행복과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