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공구인 칼럼] 불운에 포기하면 끝
산업용 전문 철제 가구 브랜드 ‘록키’는 1979년 당시 록희 엔지니어링 설립에서 시작되었다. 박승부 회장은 금오공업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 제조사를 운영하면서 찾아온 시대변화에 따라 아이템에 변화를 주며 성장 할 수 있었다.
공구유통 또는 제조를 하면서 자신의 브랜드로 새로운 제품 제작을 꿈꾸는 공구인이 많다. 그러나 유통과 제조는 다르다. 제조업, 특히 산업공구와 관련된 제조업을 하는 사람은 시대에 따라 그때 그때 새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창의력 넘치는 제품을 만들더라도 내가 만드는 물건과 비슷한 후발 주자의 제품이 반드시 나타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10년 전에는 잘 팔렸던 물건이 어느 날 부터는 잘 안팔리기도 한다. 내가 운영하는 ‘록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제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설비가 꼭 필요하고 또 새로운 아이템이 나왔을 때 그에 맞는 새로운 설비와 기능을 새롭게 갖추기는 제품 개발보다 어렵다. 제조업을 하는 사람은 늘 새로운 시장을 찾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제조만 힘든 일이 있는 것 아니다. 평범한 학교 선생에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록키’를 세우기 전 나는 금오공고의 선생님이었다. 1970년 이낙선 상공부장관이 일본정부에 기술고등학교 설립협력 요청하면서 1972년 금오공고를 설립한다. 설립 당시에는 전 학생이 무료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기술 교육을 받고 기술사관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나는 금오공고 초창기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다른 선생들과 함께 일본에서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학 기회도 주어졌다. 그런데 나는 신원조회를 신청하였으나 당시 현행법상 연좌제에 해당되어 통과되지 못하였다. 눈앞이 깜깜했다.
학교에서는 내게 신원조회 문제를 해결 할 시간을 주었고 그 사이 학교에 설치 될 최신 공업장비를 확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어떻게 보면 위기였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덕에 한국에 홀로 남아서 장비를 설치하는 일본인 기술자들 여럿과 친해질 수 있었고 일본의 선진 기술을 보다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신원문제를 해결해 나는 나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교육을 받을 수 있다. 신원조회탈락 때문에 24명 단체연수에서 단독연수를 가게 되니 혼자 교육을 받는 것이라 사실상 과외를 받는 것처럼 좋은 대우를 받으며 교육 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 이후 해외로 나갈 때 신원문제를 해결했고 해외에서 교육받은 기록이 있어 냉전시대 속에서도 나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처럼 어찌 보면 찾아오는 위기나 고난도 생각을 달리하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금오공고의 교사로 부임해 8년간 교사 생활을 한다. 그런데 70년대 후반 주변의 권유와 응원으로 자의반 타의반 나는 교육자가 아닌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설립 한 것이 록키다. 푸를 록(綠), 바랄 희(希)자를 쓴 록키(ROCKY)의 시작이었다. 지금 록키는 공구함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처음에는 정밀 측정기로 시작했고 또 클램핑툴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 초 그 시대에는 프레스 금형이나 밀링, 보링, 머시닝 센터에 사용하는 클램핑툴은 당시 처음 나온 공구였다. 대기업 상사가 외국 회사의 주문을 받아 내게 제작 의뢰를 했는데 여러모로 계산을 해보니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실습으로 작업해 가공비를 낮추면 어느 정도 이문이 남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성능에는 이상이 없지만 선진국에서는 통하지 않을 상품성이 부족한 제품을 대량 양산한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있는 재산 다 털어 빚 잔치 하고 나니 상품성 부족한 ‘클램핑툴’만 가득 남게 되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공장도 월세가 싼 반지하로 옮기고 외국에는 판매되지 못한 클램핑툴을 국내 시장에 유통 했다. 그리고 그것이 록키가 성장하게 된 큰 힘이 된다. 미국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을 다소 부족한 상품도 한국에서는 충분히 통하는 상황이 있다. 만약 내가 성능에 이상 없는 클램핑툴을 미국으로 보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당장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어도 사업에 큰 도움은 못 되었을 것이다. 반면 상품성이 다소 부족한 제품이라도 남겼기에 제품을 국내에 공급하면서 나는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더불어 산업현장을 보면서 공구를 보관 할 가구가 필요한 현장을 본다. 록키가 만들 공구정리 시스템이 떠올랐고 나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았다. 이처럼 불행이나 실패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인생은 불행이 왔다고 한탄 할 필요가 없다. 좌절할 이유도 없다. 인생은 전화위복(轉禍爲福)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헤쳐나가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자기 능력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공구인들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야 된다. 물론 최선에도 차이가 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키가 작은 내가 농구 선수가 될 수 없다. 사람에게는 타고 날 때 주어지는 운명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고 적절한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길 바란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환경에서 노력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다 보면 기회는 온다. 그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가야 한다. 옛날에는 한 우물을 파라고 했으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요즘 같이 정보와 변화가 빠른 세상에 한우물만 파다 기회를 날려 보낼 수도 있다. 과거만 고집하고 새로운 도전을 등한시하면서 후발주자와 싸우는 것은 어리석다.
공구함을 만들 때 얇은 철판을 사용하여 재료비를 절약하는 것 보다 두꺼운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인건비 이익이라는 판단을 하고 다른 회사보다 두꺼운 철판을 사용했다. 그랬더니 처음 고객들은 튼튼하고 오래간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회사 입장에서는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 새로운 매출 발생이 잘 일어나지 않고, 현시대 고객은 제품이 무겁다 말 한다. 그리고 후발주자들도 나타났다. 기억하자 영원한 베스트셀러는 없다. 다만 새로운 신제품을 꾸준히 만들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이 있다. 근래에 록키는 지식산업 센터를 짓는 등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실버스타 스텔론이 주연한 영화 ‘록키’를 보면 주인공은 항상 도전하는 권투 선수의 입장이다. 나의 회사 ‘록키’도 그 영화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름이 같은 것처럼 우리는 항상 도전해야 했다.
나도 과거에는 월세를 내며 공장을 운영 했었다. 그러나 월세를 내면서 제품 판매만으로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 않더라. 지인의 강력한 권유로 떠밀리듯 아파트형 공장을 분양 받았다. 월세 대신 은행 대출금을 내는 것은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월세 대신 대출금을 냈지만 공장가격이 올라 자산 증식을 이룰 수 있었다. 또 지금의 인천 공단의 자리를 여유있게 분양 받으면서 필요한 공간을 충분히 쓰고 남는 공장부지는 가격 상승으로 자금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오프라인으로 공구장사를 하는 공구인이라면 온라인 유통도 시도해보고 남는 공간이 있다면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 해보자. 앞으로는 분명한 저성장의 시대다. 내가 하는 일 말고도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공구인들의 도전을 응원한다.
글 _ 박승부 (주)ROCKY 회장 / 정리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