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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속리더십 - 세력 갈등과 리더의 역할

 

세력 갈등과 리더의 역할

 

당파간 균형 꾀한 영·정조의 탕평책

  

 

 

 

 

흔히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로 구분되는 이데올로기 갈등은 비단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 논쟁 플랫폼이었던 ‘붕당정치’와 리더(군주)의 중재역할을 통해 오늘날 이념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와 덕목을 살펴보자.

  

오늘날 정당과 같았던 조선시대 붕당


자신들의 비슷한 정치적 견해나 사상, 학풍을 기초로 하는 집단은 예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 이들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세력을 키우고, 각자의 정치적인 활동을 행해왔다. 과거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며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무인세력과 결탁해 조선 건국을 이끌었다. 건국 이후 신진사대부들의 정치 세력은 자연스럽게 붕당(朋黨·학문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형성된 집단)으로 이어졌다. ‘붕당정치’는 조선시대의 이념적 논쟁의 플랫폼이었다.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은 두 개 이상의 정치 세력이 서로 공존하고 견제하면서 더욱 발전하는 데 있다. 한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면 그 세력의 권력이 커지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게 되는데 이럴 때 그걸 견제하고 바로잡아줄 수 있는 반대 세력이 있어야 정치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신진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당시부터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훈구파(勳舊派)’는 권력의 중심에서 조선의 여러 제도를 마련한 정도전, 조준을 비롯해 신숙주, 한명회 등으로 이어진 계보였다. 다른 하나는 ‘사림파(士林派)’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키우는 데 힘쓰고 도덕과 의리를 중시한 사람들로서 주로 길재의 제자들이 많았으며,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이 이 파에 속한다. 훗날 사림파의 계파 구분을 통해 조선시대 붕당정치가 시작되는데,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 정당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당 분화되며 깊어진 갈등 건전한 견제에서 비난과 모함으로


최초 이들의 갈등은 조선 건국의 핵심세력인 훈구 세력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각종 비리를 저지르자, 성종 시절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이 등용되면서부터였다. 훈구파는 어떻게든 사림파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훈구파와 사림파로 시작된 조선의 붕당은 시간이 지나 사림파가 보다 세분화되면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구분되었다. 임진왜란 시 왕이었던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이 중앙정치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는데, 사림은 이황·조식 학파가 중심이 된 ‘동인’과 이이·성혼학파가 중심이 된 ‘서인’으로 나뉘어졌다. 그 후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하였다. 이렇게 복잡하게 분화된 붕당은 이후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를 거쳐 갈등이 격화된다. 정치적으로는 북인이 집권했던 광해군 시기와 남인이 잠시 집권했던 현종시대를 제외하고는 주로 서인이 핵심세력으로 집권했다.
본격적인 붕당정치의 폐해가 드러난 것은 바로 숙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남인이 몰락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른바 ‘환국(換局)’이 나타나게 되는데, 환국이란 특정 집단이 상대방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지 않고 집권하면서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상황전개를 말한다. 특히 숙종은 이런 환국을 이용해 정국을 풀어나가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조선시대 붕당정치는 처음에 서로 균형과 견제가 가능했지만 시간이 지나 변질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아닌 모함과 부정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심지어 왕이 이들의 싸움을 역으로 이용하여 수시로 자신의 세력을 갈아엎어가는 환국정치로 타락하기에 이르렀다.


 
근거지 서원 정리, 주재자 권한 약화 등 철저한 균형책 편 영조


붕당정치의 폐단 속 당시 노론의 힘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 영조는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는 ‘탕평책’을 시행했다. 붕당이 일으키는 정쟁의 고리를 끊기 위해 무엇보다 붕당의 기반부터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론의 주재자로 여겨진 산림(관직을 고사하고 재야에 은거하는 선비 계층)을 부정했으며, 붕당 형성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붕당간의 요직경쟁을 부추긴 ‘이조전랑’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악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가졌던 ‘후임자 천거권’과 ‘삼사(사헌부, 사관원, 홍문관 세 기관으로 조선시대의 최고 권력기관) 관리 선발권’을 폐지하였다. 이렇듯 영조의 탕평책은 전제 왕조대에 격렬한 파당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이전보다는 발전된 정책운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에서도 허점은 드러났다. 자신의 정치적 후원인 격이었던 노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당시 정치적으로 완전히 패배해 지방으로 밀려나있던 소론과 남인들을 인위적으로 등용한 ‘기계적 탕평’이었는데, 이는 판서에 노론을 임명한다면 참판은 소론이나 남인을 임명하는 식이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노론이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모함하게 되고 영조와 정치적 타협을 하고자 하였으나, 영조는 노론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닌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놓고 죽여버리는 극단적이고 잔혹한 방식을 택했다.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정도의 극단적인 선택에 놀란 노론은 겉으로는 영조에 복종하고 영조가 택한 탕평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탕평의 한계는 그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노론이 본격적으로 그들의 욕심을 드러내면서 위기가 시작된다.

 

 

원칙보다 실질적 인재 등용 짧지만 유능했던 정조의 리더십


총명한 군주 정조는 할아버지의 ‘기계적인 탕평’이 아닌 ‘문화적인 탕평’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들고 나왔다. 당시 학식 면에서 이미 최고 수준에 이른 정조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론 대신들을 학문적으로 완벽히 제압하며 자신을 겉으로나마 존경하게 만든 후 그 틈을 이용하여 소론과 남인들을 적극 등용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스승이 되어 정약용과 같은 인재를 육성하기도 했다. 이렇게 영조에 이어 정조 시대에 유능한 군주의 리더십은 탕평이라는 정책과 맞물려 고른 인재등용이 가능한 붕당 본연의 취지에 맞는 정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정조가 숨을 거두고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그동안 숨죽이고 지낸 노론의 독주가 시작되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섭정을 시작한 후 비로소 ‘조선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하며, 붕당정치의 몰락과 더불어 조선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민주시대 필요한 바른 비판과 견제 기본 가치는 상대 이해와 존중


붕당정치가 오늘날 이념갈등의 홍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이념적 갈등의 본질은 매우 민주적이라는 점이다. 올바른 비판과 견제가 공존할 때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하게 되고, 가치는 성숙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다당제의 민주주의 제도는 매우 훌륭한 붕당정치의 기본 틀로서 인식해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는 기본 가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비판과 견제가 도를 넘어 상대에 대한 모함과 수준 낮은 싸움으로 번질 경우 조선시대의 환국정치나 붕당정치의 폐해와 다를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사실이겠다.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차이는 유능한 군주 한 사람으로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또한 역사를 통해 유능한 군주 시기에는 탕평이 가능할지언정 그 리더가 죽고 난 뒤 다시 갈등과 혼란의 국면에 빠지는 모습을 살펴보면 특정 리더에 기대어 올바른 이념의 장을 공존시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정답은 각자의 성숙한 민주의식이다. 극우, 극좌의 이념 대립 속에서도 현명한 다수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할 때이다. 정조가 부패한 노론을 핍박하기 보다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과 융화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문화를 부흥시켰던 것처럼 극단적이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사고보다는 보다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아는 성숙한 가치가 중심이 되었을 때 오늘날 이념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밝고 건전한 미래를 기약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진행 _ 장여진 / 글 _ 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