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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 속 이달 - 재미실업가 김종림

 

하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재미실업가 김종림

 

 

 

 

 

얼마 전 최초의 스텔스 전투기 F-35A가 국내 도입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F-16C, F-15K 전투기에 이어 최신예 스텔스기가 들어오다니 대한민국이 선진공군이란 말이 실감난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을 이룬 역사적인 인물이자, ‘쌀로서 대한민국의 날개를 만든 장본인’ 김종림 선생에 대해 살펴본다.

 

공군의 미래에 담은 독립의 꿈 최초 비행학교를 열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극복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 35년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이자 고통의 시간이었다. 비록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군대마저 해산된 상황이었지만 구국을 위한 열망은 무력을 키웠다.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의병운동의 무력항쟁론과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실현되어 끊임없이 조국해방을 위해 일제와 싸워왔다.
이 때 일반인에겐 생소하지만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최초의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력의 중요성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공군의 아버지 노백린 장군. 무력항쟁의 방식 중에서도 항공기의 중요성과 공군력의 가치를 강조했던 노백린 장군은 무엇보다 비행학교를 설립하여 정예요원을 육성하는 것을 공군의 미래라고 보았다. 창의적인 사고, 오늘날로 치면 4차 산업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몸소 벤치마킹하여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학교인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노백린 장군 혼자 이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을까? 당시 가장 큰 문제이자 학교설립의 중요한 비용 문제를 해결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재미동포 출신의 거부 김종림 선생이다.

 

미국 쌀농사로 부자 된 김종림 독립운동에 재산 기부 시작


김종림은 함경남도 정평군 삼봉리의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와 함경남도 지방의 농사일에 매진했던 그는 1901년 조선에 닥친 대흉작과 1905년 11월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이어졌던 가뭄과 홍수의 재난, 일본상인들의 수탈 등의 고통스러운 악재 속에서 결국 고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나이 23세였던 1907년 1월, 이른바 코리안 드림을 가슴에 품고 미국의 캘리포니아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의 농지운영 계약제는 혹독했다. 땅의 소유주가 농사 이익의 90%를 가져가고 소작농에게는 단 10%만 분배하는 제도였다. 또한 그는 인종차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14년 미국노동자로서 처음으로 큰 수확을 내게 된다. 특유의 사업수완과 성실함을 토대로 그해 13만평에서 6,200석의 쌀을 재배했다. 인생의 성공가두를 시작한 그에게 큰 기회도 찾아온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로 인한 쌀값의 폭등이었다. 1915년 100에이커(약 12만평)를 시작으로 1919년 3,400여 에이커(약 400만평)에서 거둬들인 쌀은 약 2만2천석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한번쯤은 온다고 했던가. 갑작스럽게 부자가 된 김종림은 그토록 어렵게 축적해 온 부를 사용할 투자처를 찾게 된다. 오늘날 돈이 있는 사람이 투자를 할 수 있고 결국 더 큰 부자가 되는 논리처럼 당시만 하더라도 돈을 불릴 투자처는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투자처 중에서 김종림의 선택은 뜻밖에도 조국의 독립이었다. 그는 인생의 성공을 맛본 이 시기부터 ‘독립 운동하는 미국의 거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재미실업가가 품었던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정은 다방면의 기부활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김종림의 기부활동은 미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1909년 미국 교민단체로 창간한 신한민보에 인쇄기계 구매를 필두로 1919년 1년간 당시 3,400달러를 기부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재산기부 활동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결국 쌀로 벌어들인 농사꾼의 돈은 온전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쓰였고, 임시정부는 이러한 김종림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며 감사장을 보내기도 하였다. 

 

공군력 중요성 공감하며 학교 설립 파란만장했던 1년간의 운영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기부활동을 하던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비행학교 설립의 꿈을 갖게 된다.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던 1920년 노백린 임시정부군무총장을 만나 그로부터 독립군 공군 양성계획을 듣는다. 조국이 없어지고 일본의 핍박을 피해 떠났던 김종림은 무엇보다 자유롭게 조국의 상공을 날아 독립을 위한 포탄 투하를 할 수 있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공감했고, 결국 노백린 장군과 함께 독립군 공군 양성계획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최초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그는 1920년 일시불로 200만 달러, 매달 3천 달러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등 한해 약 5만 달러를 비행학교 설립·운영에 기부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120억원에 달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20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군 공군 양성을 위한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민 1.5세대들을 훈련생으로 교관, 훈련비행기, 정비사 등을 정비하여 6월 교육생 30여명을 훈련시키는 등 미국 땅에서 조선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최첨단 훈련기 3~5대를 보유하고, 시스템을 정비한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즈음 비행학교에 큰 악재가 발생한다. 1920년 10월 김종림이 운영하던 농장이 폭풍우로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것도 모자라 쌀 추수기에 대홍수로 농사가 흉작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개교된 지 고작 1년이 지난 1921년 4월, 자금난으로 폐교하게 된다. 

 

 

경제적 악재 이어지며 폐교했지만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큰 역할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김종림은 활발한 독립운동과 농업활동으로 재기를 꿈꿔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국의 소작농 활동을 이어가다 1973년 LA의 한 요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최근 이러한 그의 조국독립과 비행사 양성에 기여한 공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 대중매체가 그의 아들들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자식 또한 그의 아버지가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투자하고 설립자였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들이 밝힌 아버지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1920년 대홍수로 모든 것을 잃고 재건의 노력을 많이 하셨지만 계속 소작농으로 어렵게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젊은 날 김종림 선생이 바쳤던 순수한 열정의 산물.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가치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1921년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폐교했지만, 당시 조종사 비행학교에서 양성된 조종사들은 만주와 일본으로 건너가 다양한 전투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최초로 비행사 자격증을 받는 등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활발한 비행활동을 수행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이후 임시정부에서는 최용덕 장군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공군설계위원회’가 조직되고, 마침내 1949년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로 이어지게 된다. 

 

나라와 사회 공헌 위한 순수한 기부로 더 빛나는 가치

 
누군가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요즘 사람들은 “그저 돈을 벌거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또는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답이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간다. 사업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그 이익이 지역경제에 순환이 되면서 국가도 유지된다. 그렇기에 경영인이 추구하는 이익의 창출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한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큰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 어떠한 순간이 와도 그렇게 벌어온 이익을 조국과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순수한 마음가짐이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가치가 되지 않을까.

 

진행 _ 장여진 / 글 _ 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