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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 속 이달] 광해군의 실리외교로 본 리더의 처세술

 

광해군의 실리외교로 본 리더의 처세술

 

비운의 왕 광해군 다시보기

 

 

 

 

세자 때부터 전란 겪으며 왜적과 싸워온 광해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군’이란 칭호를 받는 사람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아픔이 콤플렉스로 자리 잡아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극악한 폐륜까지 폭군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지만, 광해군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 않다. 영화 ‘대립군(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대신해 돈을 받고 대신 군복무를 했던 하층민)’처럼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대립군과 함께 왜적에 대항해내는 군주로서 충분한 자질을 보여줬으며, KBS 대하사극 ‘징비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전란을 극복하기 위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을만 했음에도 결국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반정이라는 불명예를 쓰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혼(李琿). 1608년 34세의 나이로 선조에 이어 왕으로 즉위했는데, 참으로 쉽지 않은 즉위였다. 조선의 가장 큰 변란인 임진왜란이 1592년 그의 나이 고작 18세 때 발발했다.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누고 본인이 이끄는 원조정(元朝廷)은 의주지역까지 피난을 통해 국가로서의 명맥을 잇는데 주력했다. 대신 민심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란의 구심점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세자에게 ‘분조(分朝/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맡겨 전란이 한참이던 아래 지역으로 내려 보냈다. 아마도 조선의 역대 왕자 중 가장 위험하고 힘든 삶을 경험한 사람으로 짐작된다.


쌀로 공물 통일시킨 ‘대동법’ 등 백성 위한 정책 펼쳐


그는 아버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아들도 아니었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에게 세자 위치 또한 뺏길 뻔했던 불안한 시절들을 넘기며 우여곡절 끝에 선조의 죽음으로 인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올라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펼쳤다. 대동법과, 전란을 극복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그랬다. 대표적 정책인 대동법을 살펴보자. 기존의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조정에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이때 관리들이 백성을 대신해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 배씩 가중시켜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이 생겨 극성을 부렸다. 대동법은 이 폐단을 막고자 특산물 대신 쌀로 공물을 대체하여 통일시킨 제도였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과 함께 직접 전선에서 왜적들과 싸워가면서 처절한 백성들의 삶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그였기에 이는 누구보다 백성을 위한 정치였다.

 

 

사대국 명나라 원조 요청에도 최소한만… 명분보다 백성 우선한 실리외교


광해군은 외교에도 영민했다. 실리를 추구하며 현실감과 균형감각을 보였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로 대표되는 동북아시아 정세는 후금(훗날 청나라)의 성장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만주지역 여진족을 통일한 후금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명나라 본토를 위협했고, 결국 전투가 발발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만력제를 파병해 왜군을 쫓아내는 데 일조한 이유로 조선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명나라는 유교를 신봉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각별했다. 조선의 태생부터 황제국이자 당연하게 사대해야만 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고려의 충신 최영, 삼봉 정도전이 고조선 시절부터 우리 본래의 영토였던 요동 땅 정벌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왕권을 빙자한 기득권과 사대부들의 반대로 실패했고, 이후 200년 넘게 요동의 주인이자 조선 위의 황제국 위치로 군림했던 국가가 바로 명나라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선택은 명분보다는 실리였다. 임진왜란을 몸소 체험한 왕으로서 명나라의 도움보다도 백성들과 의병 스스로 국가를 지켜왔음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명나라 파병군의 횡포 또한 극심하여 조선 백성들이 몸살을 앓았던 것들을 감안하면 명분보다 백성의 안위를 근간으로 실리를 취하는 것이 지극히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명나라는 이전에 원조를 한 바 있으니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무턱대고 명분만 따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최대한 시간을 끌며 억지로 군사력을 수습한 후에 강홍립에게 파병군의 책임자직을 맡기고 명나라에 1만 5천여명의 파병군을 보냈다. 그리고 은밀한 지시를 했다. 패하지 않을 방도를 찾고 군사들의 피해를 줄이라는 것이었다(‘명나라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구하는데 힘쓰라’/광해군일기).

 

뛰어난 외교력 불구 사대부 반발로 폐위된 광해군

 
결국 후금에 전략적인 투항을 택한 강홍립은 ‘조선은 후금에 대한 원한이 없고, 출병한 것은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부득이했음’을 피력했다. 전략적으로 이루어진 투항으로 인해 후금과의 큰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성과를 얻어냈지만, 그 후 이 사실을 안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배신했다며 반발이 극에 달했다. 당시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높이 평가받아야 했지만 조선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명나라를 하늘같이 섬기고 광해군의 개혁정치에 반발을 했던 이들은 서인세력들이었는데, 서인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정치를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거기에 광해군이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사사했다는 등의 폐륜까지 이유 삼았다. 결국 서인들의 주도로 1623년 그의 재위 15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폐륜에 대해서는 당시 세자시절부터 재위기간까지 숱하게 있었을 위기와 모략, 그리고 서인, 북인으로 격하게 대립했던 정치적 역학관계를 생각한다면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어찌되었건 누구보다도 백성을 아끼고 외교적인 문제에 있어 실리를 추구하는 최상의 현실적인 감각을 갖추었던 그의 정치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결국 서인들의 주도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친명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훗날 후금이 세운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땅에 머리를 찧고 치욕스럽게 항복을 했던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영자는 ‘처세’ 중요… 실리 추구하되 의리 지키는 균형


오늘날 리더들에겐 ‘처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세는 결국 비즈니스 철학이고, 가치의 표상이다. 명분과 대의를 저버린 약은 행동들이 지나치면 파트너들이 떠나게 되고, 자칫 사리사욕만을 탐하는 소인배로 몰락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대의와 명분, 현실적인 상황 사이에서 적당하게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다. 물론 광해군의 사례를 통해 무조건적으로 적을 많이 만들 경우 낭패를 볼 수 있음을 반정 사태를 통해서 역으로 유추해볼 수도 있다.
광해군의 현실정치는 오늘날 사업을 꾸려나가는 경영인들이 갖추어야할 균형감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적으로 폭군이라는 인식으로 폐위를 당한 비운의 임금 광해군.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바로 ‘실리’, ‘균형감각’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진행 _ 장여진 / 글 _ 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