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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 속 이달 - 지금 우리에게 묘청의 정신 남아있나

 

지금 우리에게 묘청의 정신 남아있나


고려 ‘묘청의 난’ 통해보는 혁신의 가치

 

 

 

 

역사상 가장 웅대하고 기상 넘쳤던 사건 중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885년 전, 2월에 일어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음력 1135년 1월 4일)’이다. 단순히 개인 신분에 대한 불만이나, 먹고 살기 어려워 세상을 뒤엎기 위한 반역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대주의에 빠져 부패한 고려 문벌귀족

  
1170년 무신정변이 발생하기 전까지 고려의 핵심 지배계층이었던 문벌귀족은 신라 말기 부정부패한 왕실에 대항해 백성을 생각하고 합리적인 정치를 펼치고자 했었다. 하지만 초기의 의지가 퇴색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신라말기 귀족세력과 다를 바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집단으로 변질되고 만다.
묘청의 난 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성장한 문벌귀족의 폐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고려는 내부적으로 문벌귀족이 지배하여 점점 부패되고,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국의 강자로, 중앙아시아의 신흥강자로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자연스럽게 당시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금나라와의 사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그는 전형적인 중세의 유교적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문벌귀족을 일컬어 당시 고려 수도 개경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하여 ‘개경파’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는 개경파 중에서도 수장격이었다.

 

묘청, 부패 귀족 몰아내고 수도 옮기자 주장


김부식과 상반된 입장을 가진 자가 바로 ‘묘청’이었다. 묘청의 정확한 이름이나 초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고려 인종 때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가 내우외환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는데, 귀족세력의 부정부패와 반란 등으로 왕권이 매우 약화되었으며, 사회 기강마저 무너지는 등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무엇보다 왕이 당시 개경파를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에 환멸을 느끼고 위협감이 절정에 달했을 때 묘청이 등장했고, 그는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했다. 당시 수도였던 개경(지금의 개성)을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이전하자는 것이었다. 서경 천도는 풍수와 도참사상을 근간으로 하였는데, 풍수 도참은 통일신라 말기를 거쳐 고려 일대를 풍미한 불교 못지않은 사상으로 특히 땅의 기운이 쇠퇴한 곳에서 왕성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고려가 부강해질 수 있다는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의 풍수론에 근간을 두었다. 결국 자주의식에 기반을 둔 묘청은 이와 같은 풍수적 논리에 입각해서 부패한 개경 문벌귀족을 몰아내고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이다. 서경천도는 거슬러 올라가 고려 태조왕건이 고려 건국 당시부터 주장했던 ‘북진정책의 승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수도를 고구려 시대의 평양으로 옮기고, 더 나아가 인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나라 정벌까지 주청했으니, 말 그대로 사대를 거부한 자주 선언이었다. 
“서경 임원역(林原驛) 땅이 풍수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금나라도 조공을 바쳐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36국이 모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자주독립국가 기대했으나… 자연재해로 서경천도 불발

 
묘청은 인종을 설득했고, 결국 인종도 서경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천도를 통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경천도가 불발된 것에는 뜻밖의 자연재해가 한 몫을 하게 된다. 당시 왕의 움직임이나, 자연적인 요소에 따라 명운을 점쳤던 당시의 고려인들에게 음력 3월에 눈이 내리거나, 극심한 가뭄이 닥치고, 하늘에서 지는 별똥별의 잦은 출현 등의 이상 징후는 반대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고, 결국 인종은 반대파의 설득에 못 이겨 서경천도를 포기하게 된다. 1135년(인종 13년) 정월, 묘청은 서경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개경의 귀족들과 전쟁을 선포했다.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고 자신의 군사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불렀으나,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닌 부패한 귀족들을 몰아내고 새롭고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더욱 그러했던 것이 본인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국왕에게 알렸으며, 개경의 문벌귀족을 몰아내고자 함을 분명히 했다. 거사소식이 전해지자 두려움을 느낀 인종은 문벌귀족의 대표 김부식을 토벌대 대장으로 삼았고 반란군 진압을 명령했다. 김부식은 당시 개경에 남아 있던 정지상 등 묘청의 측근 일체를 참살했으며, 1년간의 긴 토벌작전을 통해 결국 반란을 진압하고 묘청의 난은 역사 속에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신채호 ‘역사상 가장 큰 사건’ 평가… 기득권 타파해 민족 자주성 호소

 
결과적으로 반란을 진압했던 김부식의 뜻대로, 고려는 서경으로의 수도 천도도 이뤄지지 못했고, 그 이후 무신정변이 일어나기까지 고려사회는 문신(文臣)이 득세하는 어찌 보면 안정 지향적인 사회로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문벌귀족이 주요 요직을 독점하게 되는 사태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면서 결국 훗날 무신정변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작 1년간의 정치적인 국내 반란 사건을 놓고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마저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며, ‘묘청의 난이 실패하면서 민족의 자주적 흐름이 끊겼다’고까지 이야기 하였을까.
묘청과 김부식의 입장 차이는 오늘날의 갈등양상과도 꽤 닮아있다.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묘청은 자주적인 전통주의의 입장이었다면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였다. 즉, 묘청이 금나라를 정벌하고 고구려를 계승하자는 자주적 논리였다면 김부식은 사대를 통해 약소국으로서 안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김부식의 승리가 된 후 금나라에 이어 원나라가 득세하기까지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군사력을 키우기는커녕 기득권을 지키는데 급급해 국가의 쇠퇴를 가져왔다.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의 생명줄을 연장시킨 꼴이 되었다. 
또한 묘청의 난이 다른 반란과 다른 것은 절대 본인들을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인이 왕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개경의 귀족들을 몰아내고, 수도를 천도함으로써 금나라와의 사대를 반대하는 자주적인 입장만을 부각시켰다. 이런 점들이 역사 속에서 묘청의 난이 높게 혹은 다시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공동체 위해 희생할 수 있나’ 자주적 혁신 필요

 
사람들은 저마다 신년 계획을 통하여 자기만의 이상과 한 해의 계획들을 꿈꾼다. 현실에 안주하고 무엇보다 안정만을 택하는 것을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혁신하고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보다는 주변과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측면에서 변화를 꾀하는 부단한 노력,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묘청의 기상, 자주적인 노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기해년(己亥年)을 맞아 묘청의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통해 스스로의 혁신을 꾀하는 우리가 되길 희망해본다.

 

진행 _ 장여진 / 글 _ 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