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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 속 리더십 - 가치관이 결과를 바꾼다

 

조선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가슴 아픈 이야기인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리더들이 보였던 행동에는 각기 다른 가치관이 있었다.


 

가치관이 결과를 바꾼다

 

성삼문, 김시습, 신숙주 이야기

 

 

 

 

세조 집권으로 인한 분열… 가치에 따라 행동한 리더들

 

역사 속 많은 리더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훗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쓰곤 했다. 행동의 명분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질 것이고, 훗날 역사가 그것을 평가해 줄 것이란 믿음에서다. 행위의 판단이 되는 기준인 ‘명분’은 말 그대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가치관일수도 있고, 시대적인 가치를 지키는 정당성에 기초할 수도 있다. 사전상으로는 신분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표면적인 구실을 뜻한다. 결국 행위의 기조가 될 수 있는 중요한 평가의 근거라 하겠다. 따라서 단편적인 사실로 리더를 옳고 그르게 판단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 계유년에 벌어진 사건으로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임금이 단명하고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숙부이자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이 충신 김종서를 죽이고 친동생인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그렇게 수양대군(세조)은 조선의 7대 왕으로 즉위했고, 이를 놓고 당시의 유생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정통성을 놓고 갑론을박의 분열이 있었다. 성삼문, 김시습,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 이후 각자의 선택을 통해 대표적으로 가치관을 찾은 이들이다. 각자의 나름대로 일리 있는 가치관과 선택에 대해서 인물의 행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의 중시하며 단종 복귀 계획, 충절의 상징 성삼문


성삼문은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했던 일부 신하들은 그를 암살하고 단종을 복귀시키자는 계획을 세운다. 여섯 명의 뜻을 함께 했던 사람은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 이었고, 훗날 이들은 사육신(死六臣)으로 고려 마지막 충신 정몽주와 더불어 군신간의 의리를 지킨 충성스러운 신하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성삼문은 이들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1418년에 태어났고 1456년에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으로 39세에 안타깝게 생을 마쳤다. 143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을 했던 당대의 석학으로 집현전 부제학, 예조 참의,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신숙주와 친구였으며, 당시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했고 경연관으로서 세종의 총애를 한껏 받았다. 세종시절 본인의 학문적 자질을 한껏 발휘했지만, 그는 신하로서 충절이라는 덕목을 가장 중요시했다. ‘충절과 대의’는 명분 그 자체였다. 결국 그러한 명분을 지켜내기 위해 과감하게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귀시킬 계획을 꾸몄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명분을 위해 거사를 계획하고 시도했던 적극적인 인물이다. 성삼문의 가치는 결국 조선 왕조의 정통성, 그것을 지키는 신하된 도리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사육신의 세조 암살 계획이 실패했고, 그들은 세조에 의해 처참하고 잔혹한 형벌로 능지처참 당했지만 오늘날 성삼문을 두고 감히 역적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유교적인 가치에 기초를 두고 신하된 자로서 왕위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했던 성삼문의 행위의 명분은 바로 충절과 신하된 자로서의 정통성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은둔형 지식인 김시습


성삼문 등이 죽음으로써 사육신이 되어 이름을 남겼다면 생육신(生六臣)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의 여섯 신하를 말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김시습은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해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아는 당대의 신동이었다. 당시 왕이었던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천재적인 학자였지만 21세 때인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사육신이 처참하고 잔혹하게 능지처참을 당하고 시신이 버려졌을 때 그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가에 임시 수습했던 인물도 김시습으로 전해진다. 
김시습에게 행위 속 가치관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성격과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매우 자유분방하고 한량스러운 학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의 유랑의 동기에 대해서 적은 글귀를 보면 그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하여 명리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최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제에 의해 핍박받던 항일 독립운동기 시절 학자 중에 속세에 뜻을 접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지식인들이 많았다. 일제의 만행은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적극적인 항일투쟁은 하지 않았던 당대 지식인의 쓸쓸했던 모습은 어찌 보면 김시습과 매우 유사하다. 김시습에게 가치관이란 ‘거역하지 않는 삶’으로 보인다. 세조의 계유정난을 부정하고 비판한 채 자취를 감춘 은둔형 충신. 그런 지식인의 한계가 깃든 아픔이 서린 선비의 모습이다.

 

 

왕위 정통성보다 국가 중요시, 실리의 상징 신숙주


“내 아들의 병세가 심상치 않으니, 어린 세손을 잘 부탁한다.” 세종대왕이 성삼문과 신숙주에게 남겼다는 부탁은 드라마나 소설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세종대왕의 신하로서 성삼문과 신숙주는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나이차도 한 살 남짓하였고 유생시절부터 친구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우정도 역사적인 사건 앞에서 사상과 가치관의 차이를 가져왔으니, 신숙주는 성삼문과 달리 현실을 택했다. 신숙주는 익히 알려진 대로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학자였다.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어린 왕(단종)이 즉위할 경우 벌어질 왕권의 약화는 결국 국가의 위기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계유정난에 찬동하여 세조의 편에 처음부터 섰던 것은 아니었으나, 대세가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지자 국가 재건의 뜻을 펴기 위하여 세조의 신하로 충성을 다했다. 옛날 정도전이 이성계를 선택했던 것처럼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문무를 겸비한 세조를 군주로 택했던 것이 아닐까. 신숙주의 업적은 단순히 단종을 배신한 변절자로 치부하기엔 다양한 분야에서 화려하다. 그는 언어학에 천재적이었는데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 동아시아 언어에 모두 능통해 그 나라들의 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겨 문화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으며, 외교적 센스가 탁월해 쓰시마 섬에서 왜와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다. 대여진 외교도 담당하여 여진족과 반목이 있을 때 조선의 대표로 이를 조정하고 여진 추장들을 회합하는 역할도 했다. 또한 민간상업의 진흥을 주장했으며,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을 정벌하는 등 군사전략가로서도 큰 공을 세웠다. 당대의 천재 신숙주에게 시대적 가치관은 왕위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보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왕 중심이 아닌 국가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다양한 방면에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으며,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로 그의 손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인간적인 구실로 마냥 비난하기는 무리가 따른다.

 

도덕적 가치 갖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라


가치관이 달랐기에 역적, 방랑자, 이름을 날리는 재상으로 각자의 길을 걸었던 성삼문, 김시습, 신숙주.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이들이 선택한 가치가 분명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더로서 다양한 행위들을 선택할 일이 많다. 그때마다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자신의 가치관에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가치가 반도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만 원칙을 두었으면 한다. 특히 점점 더 개인화 되어가는 오늘날 사회에서 반도덕적인 가치는 결코 정당할 수 없다. 히틀러의 나치 학살, 일본 731부대의 생체 실험과 같은 부류의 행위는 시대를 뛰어넘어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반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기본 가치를 지키는 범위의 명분은 스스로 정하고 끝까지 확실하고 밀어 붙이는 것도 리더로서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고한 뜻을 가졌을 때 언급한대로 훗날 역사가 본인의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해줄 것이다.

 

글_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