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체메뉴 열기

COLUMN

[공구인 칼럼] 여성 공구인으로 살아남기

 

아직까지 남자들의 세계인 공구 시장. 여성 공구인으로서, 한 회사의 여대표로서 공구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에게 기대려 들지 말고 당당하게 홀로 설 줄 알아야 한다.

 

왜 이래, 나 이민숙이야!

 

자존심으로 만들어진 1등 기업

 

내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다. 사업 전에는 대기업에서 영업 일을 하며 아이 둘을 키우던 나였다. 그 때는 내가 봐도 참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영업 일도 하며 아이들 키우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싶어 제2의 업으로 공구를 받아 파는 일을 시작했다. 그 공구가 바로 전선 릴이었다. 그렇게 제조사에서 전선 릴을 받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일을 하다 보니 이왕이면 내가 만들어서 파는 게 훨씬 이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나를 보고 배아파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사업자를 내고 두 달 만에 우리 회사에 불법 신고가 접수돼 검찰 조서를 받고 끌려가는 일을 겪었다.
풀려난 건 며칠 후의 일이다. 그렇게 나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억울함이 복받쳐 올랐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나. 오기가 생겼다. 꼭 성공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였다. 또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무조건 정품, 정량을 지켜 제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전선릴시장의 1등 기업으로 당당하게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기능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까지도 우리 회사의 핵심 경영방침은 ‘정품, 정량’이다. 제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체크하고, 내가 직접 제작부터 판매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일까 기술개발부터 디자인까지 직접 담당한다. 처음엔 정말 멋도 모르고 시작한 일이다. 아마 사회 보통의 여자들은 공구 수리는커녕 공구를 만져본 적도 몇 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구를 이용해 수리 뿐 아니라 제작 등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계속 만지다 보니 알게 된 것이다. 원래 내 성격이 그렇다. 모르는 것은 알 때까지 한 가지에 계속해서 파고드는 것.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될 때까지 해 낸다. 못 해 내면 밤이 늦어도 잠이 안 오는 나다.
지금은 코드를 꽂는 부분의 수 별로, 그리고 길이별로, 또 굵기 별로 수백 가지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신제품도 몇 개씩은 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남자들은 모르는 내가 가진 여자의 센스를 발휘해 여성들도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핸드백 모양 디자인의 전선 릴을 개발했다. 어디 그뿐이랴 기존 다른 회사 제품들은 온통 흰색 제품들뿐이었던 걸 내가 최초로 노란색 전선 릴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걸 본 다른 회사들도 노란색을 따라하길래 나는 또 연두색 제품도 출시했다.
예쁜 떡이 먹기도 좋다고. 그렇게 디자인이 세련된 제품을 내놓다 보니 다른 회사 전선 릴보다 가격이 조금 더 비싸도 우리 걸 많이들 찾는다.

 

전선릴 업계 유일한 여사장

 

그렇게 오로지 내 힘으로 미주산업을 업계1위로 만들어 냈다. 그런 내 실력을 인정해 주어서인지 나를 찾는 곳이 많다. 몇 년 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전선 릴 모임도 만들어졌고 한국산업용재협회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지금은 오랜 경륜이 쌓여 어떤 사람들과도 여유 있게 대화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사람 관계가 너무 힘들기만 했던 나였다.
과거 사업 초기엔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거친 손님들도 있고 밖에서는 거래처 누구와 밥 한 끼 먹더라도 여자로 보이니까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절대 단둘이서는 밥을 먹지 않는다. 또 영업사원들의 관리가 너무 힘들어 그냥 공장 문을 닫아버렸던 적도 있다. 직원들끼리 술 마신 날이면 대리운전비 갖고 나오라질 않나, 서로 똘똘 뭉쳐서 데모를 하질 않나. 심지어 물건을 몰래 빼돌리는 직원도 있었다.
그래도 이 직원들을 함께 끌고 가야 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영업으로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는데 못할 게 뭐냐는 생각으로 내가 직접 전국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여유로워졌다. 나는 직원이 아닌 회사의 경영자니까 그만큼 내가 가진 몫은 훨씬 무거운 것이다.

 

여사장을 위한 조언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

 

가끔 보면 물건이 고장났다고 공장으로 찾아와 난리 치는 손님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일단 손님의 말을 다 듣고 차 한 잔 하게 자리에 앉히고 내가 사장이고 책임질 테니 어떤 게 불편한지 묻는다. 그리고 보는 앞에서 제품을 직접 맨손으로 분해해 설명을 해 준다. 불량이 손님 잘못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저를 만나셨으니 이번에는 그냥 새 걸로 바꿔 드릴게요. 다음부터는 소판 피우시면 안 돼요’ 라고 당부하고 보내드린다.
여자라고 무시받기 전에 제품과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일 하는데 남자 여자가 어디 있나. 주변에서 ‘대단하다.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나?’ 하고 말하면 나는 ‘내가 여자여? 쓸 데 없는 소리 말어’ 하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일하면 내가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해 왔던 경험들이 여성 공구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일하면서 만나게 됐던 공구상의 여대표가 있다. 그녀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 줬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 나무만 보고 있으면 그 뒤가 잘 안보이잖아. 지금 이 순간만 보고 있으면 안 돼. 숲을 보면 얼마나 먹을 게 많고 할 게 많은데. 세상은 넓잖아. 젊은 시절에는 정말 어렵고 힘들겠지. 그래도 그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내야 해. 그리고 남에게 기대려 들지 마. 내가 여자이기를 바라면 이 공구계에서는 살 수가 없어. 남자들과 동등해져야 해.”

 

글_이민숙 미주산업 대표 · 진행_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