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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 속 리더십 - 진정한 리더는 한계를 뛰어 넘는다

 

노비의 신분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발명가가 된 장영실,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조선 최고의 생물학 서적을 펴낸 정약전.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던 조선시대 두 과학자의 도전정신을 되새겨본다.

 

진정한 리더는 한계를 뛰어 넘는다

 

 

 

 

공노비 장영실… 신분을 뛰어넘다


노비의 신분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발명가로서 이름을 떨친 입지전적 인물, 장영실. 오늘날 신기술제품을 개발하고 산업기술혁신에 앞장선 이들에게 매주 ‘IR52장영실상’을 수여할 만큼 장영실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 장영실은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인 것은 틀림없지만, 정확한 출생과 죽음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매우 유명하지만, 미천한 출생 배경으로 출생에 관한 자료는 전무해 일생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미스테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노비는 소속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됐다. 장영실은 공노비로 동래현의 관노였는데,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당시 조선의 질서 속에서 어머니가 기녀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공노비가 된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타고난 재능이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태종이 전국의 인재를 발탁할 때 조정에 천거되었다. 천거된 계기는 가뭄이 들자 강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를 개발한 소문이 동래현에서 왕에게까지 보고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동래현의 촌놈이 큰 출세를 한 격이었다. 이후 상의원에 소속돼 뒷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과 더불어 천문기구 제작에 전념하게 된다. 천문기구 제작은 물론 철을 만드는 제련과 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장영실의 재주를 눈여겨보고 있던 세종은 국왕이 되자 그를 중국에 파견시켰고, 장영실은 중국 파견기회를 통해 천문기기 연구의 기회를 갖게 된다. 이렇듯 인재를 끊임없이 육성하고 개발시켜주는 리더의 능력은 조직을 융성하게 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귀국한 장영실은 그의 재주로 인해 노비신분이 면천됐고, 1423년(세종 5년) 상의원별좌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자격루, 금속활자… 업적으로 이름 빛내다


장영실은 1424년 중국 문물을 참고해 물시계를 완성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정5품’으로 승진한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의 제작이었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김빈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벤치마킹해 새로운 형태로 만든 것이었다. 이 공로로 그는 대호군까지 승진했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낸다. 또한,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게 된다.
장영실의 말로에 대해서도 추측 가능한 상황만 있을 뿐 노년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의 마지막 기록은 안타깝게도 세종대왕과 연관돼있다. 세종은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날 기회가 있었는데, 떠나는 길에 사용된 왕의 수레가 장영실이 감독하여 제작한 수레였다. 하필 그 수레가 부려져 그 책임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 당하게 된다. 이 때 그렇게 장영실을 총애하고 아끼던 세종이었지만 그에게 준 마지막 은총은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주는 것뿐이었다.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아낌없는 신뢰를 줬던 세종이 어찌하여 사소한 일로 참혹한 형벌을 줬을까. 당시 곤장 80대라고 하면 살점이 튀고 뼈가 부러질만한 상당한 형량이었던 점과 그 사건을 뒤로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때, 안타깝게도 곤장을 맞고 파직당한 뒤 머지않아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노년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지혜로운 자는 입으로 얘기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명언처럼 역사 속에서 성공을 이룬 그의 업적은 비록 그와 관련한 다른 기록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대를 뛰어넘어 칭송받기에 충분하다.

 

정약용에 가려진 의외의 과학자, 정약전


형제 중에서 형이나 동생이 특히 유명세를 탔을 때 상대적으로 다른 형제가 평가절하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익히 겪어왔다. 정약전의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정약전은 조선 최고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정약전은 정약용이 태어나기 4년 전인 1758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총명했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꽃을 피운 시기인데 그는 그중에서도 성호 이익의 학문에 심취했고, 그 역시 실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83년(정조 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됐고,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전적·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서양 학문과 사상에 접한 바 있는 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을 접했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신봉했다고 한다. 당시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약용과 함께 화를 입은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에 유배됐고 그의 동생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게 된다.
그를 박물자, 과학자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대표작이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적인 ‘자산어보’ 때문이다.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되었던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여, 이를 어류·패류 등으로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 분포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한 백과사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와 같은 전문서적을 만들어낸 것 자체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유배지라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일궈낸 성과라는데 의미가 크겠다. 선비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좌절할 상황 속에서도 양반 신분인 자신을 낮추고 천민인 섬사람들과 가깝게 교류하면서 어보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만으로도 오늘날 사소한 것도 쉽게 포기해버리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또한 상당히 연구가 진전된 분야에 대한 추가 연구가 아니라 전혀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특수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했던 것만으로도 과학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과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유배지서 펴낸 최초의 수산생물 백과사전


‘자산어보’에는 흑산도 주민 장창대, 선비 장덕순 등과 같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조사한 디테일한 부분까지 언급된 구절들이 눈에 띈다. 특히 일본인이 고래회를 좋아하고, 전 세계에 100여종의 고래가 있다는 것, 백상어와 법고래로 추정되는 상어과 어종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과 교미, 출산과정까지의 디테일한 묘사 등 유배기간 동안 일생의 역작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흑산도에서 유명한 홍어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데 당시 홍어는 ‘분어’라는 이름으로 기록돼있다. 홍어의 생김새와 서식지, 낚는 방법과 홍어를 이용한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돼 오늘날 이 자료를 참고해도 큰 무리가 없다. 아울러 ‘나주 고을 사람들은 홍어를 삭혀 즐겨 먹는다’고 밝혀 당시 숙성홍어 음식의 효시가 나주이고, 예나 지금이나 광범위하게 홍어가 식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 구이, 국, 포 등으로 다양하게 조리해 먹고, 홍어국을 끓여 먹으면 뱃속의 복결병에 특효가 있고 주기를 내리는데도 효험이 있으며 홍어껍질을 뱀에 물린 상처에 붙이면 잘 낫는다고 했다.
그는 서적의 전문성을 떠나 유배생활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존 신분의 위계질서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목표의식을 갖췄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 최고의 생물학 서적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는 당당히 자신을 조선의 박물자라고 칭했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대목이다. 결과를 떠나서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자 했던 목표의식이 자산어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게 이끌었을 것이다.

 

글_윤정원 · 진행_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