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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 속 리더십 - 권력 생기면 가족사랑 멀어진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을 맞아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좋은 의미에서 가족의 사랑과 화합을 되새겨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지 않은 사례를 통해 가족애를 역으로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가족 간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해 본다.

 

역사 속 가족이야기

 

권력 생기면 가족사랑 멀어진다?

 

 

 

 

태종 이방원 후계 권력투쟁의 산증인 ‘이제’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임금이자 이성계의 아들이라는 것은 ‘용의눈물’, ‘정도전’이라는 국민 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려진 바 있다. 어찌 보면 이방원이라는 이름이 조선의 태종이라는 칭호보다 유명할 수 있겠다. ‘이제’는 태종 이방원의 첫째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이름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품행이 음란하고 바르지 못해 아우인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역사란 것이 단순히 정사나 야사의 단면을 통하여 그 진실을 확언할 수는 없듯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도 그러했다. 양녕대군의 품성이 세자의 그릇에 미치지 못하여 태종이 그보다 훨씬 뛰어난 아들인 충녕대군을 택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간혹 당시 상황을 미화한 이야기로 양녕대군이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난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기 위하여 일부러 문란한 행동과 미친 척을 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각종 사고나 특히 노년의 그의 행적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보았을 때 후자의 확률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왕’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절대 권력 유아독존의 자리로 왕족의 경우 왕이 되지 못할 시 오히려 숱하게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던 점을 보면 오히려 왕이 될 수 없는 왕족의 경우 매우 불안한 신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절대 왕위의 자리를 양녕대군이 그냥 넘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역사서에 기록된 그의 행실과 노후의 기록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여색을 탐했고, 심지어는 며느리까지 탐하여 그의 아들이 충격을 받고 자살을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또한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당시 오히려 세조의 편에서 그를 독려했으며, 심지어는 수양대군의 아우인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하여 자신의 증손자인 단종을 죽이라고 조언까지 했다고 하니, 혹여 왕위를 빼앗긴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심리가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양녕대군 ‘이제’는 어려서 그의 아버지인 이방원이 그의 삼촌들을 죽여가면서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서부터 그의 조카가 종손자인 단종을 해하는 것까지 지켜본 참으로 파란만장한 권력싸움을 일생에서 목격한 특이한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떠난 이후 남은 생을 유유자적하며 편하게 지냈으니, 양녕대군 ‘이제’야말로 권력다툼 속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안빈낙도하게 편안히 일생을 보내며 일찍이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았던 인물이다.

 

왕건의 ‘가족 만들기’와 왕소의 ‘피의 숙청’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 있다면 고려시대는 광종 왕소가 있다. 잔혹하리만큼 하지만 권력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보여준 조선 태종시절 치세의 결과는 세종시대의 태평성대였다. 그만큼 왕조시대에 있어 왕권의 강화는 매우 중요했다. 고려시대는 지방호족들의 지원 속에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이 가능하였기에 초기 호족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태조 왕건에게는 왕후와 부인을 합쳐 모두 29명의 부인이 있었다. 이 중에서 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왕후는 6명이었고 첩에 해당하는 부인이 23명이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인데, 자녀들의 숫자만 해도 34명에 이르렀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당시의 정치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다. 중앙 정부는 지속되는 반란과 왕위교체로 왕권이 약화될 만큼 약화된 상황이었고, 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자연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수도였던 경주를 벗어나 점차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지방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스스로를 성주, 장군으로 칭하고 성 내 백성들에게 직접 세금을 거두는 등 지역의 맹주라고 과시하는 세력들이 생겨났으니 이들이 바로 고려시대 초기의 호족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을 일구어냈지만 불안한 신라말기의 중앙정부 통제력을 고스란히 숙제로 떠안게 되었고, 그렇게 정략적인 결혼과 왕 씨 성을 사사하는 가족 만들기 정책을 통해 흔히 말하는 ‘기브 앤 테이크’식의 거래를 호족들과 나누게 된다.
이런 시대에서 왕건의 셋째 아들 왕소가 고려 4대 황제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가 바로 고려의 광종이다. 왕소는 호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고려왕조의 기틀을 잡은 왕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데, 거기에는 친족들에 대한 숙청도 빠지지 않았다. 왕소는 호족과 공신세력을 포함해서 왕족 역시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되는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피의 숙청’은 급기야 왕실 내부 자신들의 친족에 대해서도 번졌는데, 자신의 형인 고려 2, 3대 왕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까지 죽였으며, 심지어 본인의 노후에는 자신의 외아들인 경종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대했다고 하니, 권력이란 것이 참으로 매정하다고 할 수 있겠다.

 

광해군을 위험에 빠트렸던 아버지, 선조

 

사랑하는 아들을 위험천만한 사지로 보내는 아버지가 있을까? 흔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무능한 임금이었던 선조의 경우가 그러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당시 조선 최고의 무장 ‘신립’ 장군이 이끌었던 ‘탄금대 전투’에서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자 당시 수도였던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신한 임금으로 유명하다. 물론 왕조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어찌되었건 당시 백성들은 죽어나갔을지언정 왕이 잡히는 치욕은 막았다고 그 부분을 인정할 수도 있겠으나,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은 그를 두려움을 피해 도망 다니는 졸장부로 보기에 충분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6월 선조는 평양성에서 서북쪽으로 피신하면서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뜻의 분조(分朝)를 그의 아들 광해군에게 맡겼다. 이듬해 1월 왕명으로 분조가 해체될 때까지 광해군이 7개월간 전시 임시정부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하며 의병들의 당시 항전을 독려했으니, 분조 활동은 광해군 일생의 큰 업적이기도 하다.
당시 분조에 참여했던 신하들의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의 위험성과 처절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름철이었기 때문에 자주 비가 내렸고 광해군 일행은 민가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면서 어려움을 견뎠다고 한다. 또한 “산길이 매우 험하여 열 걸음을 걸으면 아홉 번을 넘어져 일행 대소 관원 모두가 고생했다”는 기록만 봐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중국 요동의 근접 지역으로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광해군은 일본군이 사방을 둘러싸인 전장에서 전시 정부를 지휘한 리더로 성장해 갔으니,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가족을 둘러싼 매정하고, 때로는 가혹한 사실을 역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족 간의 기본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이다. 권력과 금전이 존중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가족 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삶에 지쳐 있을지언정 가족들에게 변고가 생기거나 큰일이 생겼을 때만큼은 두발 벗고 나서 함께 위로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되어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가족관계라 할 수 있겠다. 가족 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되길 기대해본다.

글_윤정원 · 진행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