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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고전 속 리더십 - 리더는 외교력이 있어야 한다

 

지난 6월 12일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반도 평화체제 안착과 종전선언의 포석단계인 미국과 북한간의 정상회담을 보며 외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리더는 외교력이 있어야 한다

 

고려 서희와 조선의 이덕형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협상력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외교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가 유지되기도 했으며, 국가 간의 무력 충돌, 더 나아가서는 대규모 학살 등도 모두 외교를 통해 발생했다.
2017년 5월, 뉴욕타임스의 메인 표지를 장식했던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 떠오른다. ‘THE NEGOTIATOR’ 라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스의 표지에 등장했다. 오늘날 미국과 북한 간 정상회담의 평화무드 속에서 외교적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문대통령의 역할을 돌이켜보면 뉴욕타임스가 먼저 예측한건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에 무르익는 종전선언과 평화무드가 무엇보다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단순히 지금의 분위기만을 가지고 평화체제의 안착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겠다. 하지만 최근 북한과 미국의 활발한 외교적 움직임 속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적 중재 노력에는 현 시점까지는 충분히 좋은 점수를 줄만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외교의 역할은 중요했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업을 확장하고 관련된 고객, 업체와의 관계, 제휴 등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외교적인 프로세스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비즈니스 관계를 통하여 사업으로 인한 피해를 예방 또는 최소화하고, 자신에게 최대한 유익하고 실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비즈니스의 바람직한 외교적 덕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송황제가 유일하게 외교파트너로 인정한 고려의 서희 


고려 초기 큰 성과로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다.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귀주의 좁은 계곡으로 유인해서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단지 2천여명뿐이었다고 하니 가히 대첩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전쟁을 통해 승리하는 것보다 더 값진 전과는 무엇일까. 전쟁을 막고 피해를 최소화시킴으로써 평화체제 구축하는 것이고, 나아가 외교를 통해 유형적인 실리를 취했다면 완벽한 협상력이라 칭송할 만하다.
서희는 942년 고려 광종 대의 재상을 지낸 서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도 좋았지만, 열아홉 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짧은 시간에 학문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던 상당히 유능한 인재였다. 중국 송나라가 건국했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2년 뒤 내의성 시랑이라는 벼슬로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니, 그러한 경험을 통해 외교적 안목은 더욱 두터워졌을 것이다. 당시 고려와 송나라와의 외교문제는 쉽지 않았다. 한 동안 사신 왕래가 두절돼 있었고, 외교 초기 송 황제 태조는 고려가 외교적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고려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서희는 여진족과 거란족이 육로를 막고 있어 외교 사절을 보내지 못했음을 설명했다. 그의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조칙을 내려 광종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의 벼슬까지 주었다. 

 

서희, 적장과 담판으로 강동 6주 획득


그렇게 서희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우던 차에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 장수 소손녕이 이끄는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싸웠지만 패배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을 빼앗기게 된다. 이에 고려 조정은 거란에게 항복을 주장하는 투항론과 영토를 떼어주자는 할지론 등 의견이 분분하게 된다. 서희는 거란의 침공은 영토 확장이 아닌 고려와의 화친에 있음을 근거로 투항론과 할지론이 모두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려를 둘러싼 외교적 현실을 완벽하게 꿰뚫은 분석이었다. 서희는 외교적 결정권을 갖고 적장 소손녕과의 역사적 담판을 갖게 된다.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를 이은 것 아니냐며, 거란을 야만이라 멸시하고 적대하는 것에 대해 용서할 수 없다며 항복하라고 위협했다. 이에 서희는 당당하지만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논리적 언변으로 대응했다. 국가의 이름이 고려인 것은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라는 것이며, 소손녕의 말대로라면 거란의 수도인 동경마저 고려의 것이라는 논리였다. 다만 고려의 입장에서 싸움은 절대 피해야 하는 상황이고 전력상 열세인 점을 감안해서 거란이 점령한 압록강 일대의 땅을 돌려준다면, 거란과 고려 사이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 거란과 우호적인 관계도 맺을 수 있음을 대안으로 강조한다. 전쟁의 위협을 받던 고려는 이처럼 서희의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오히려 ‘강동 6’주라는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게 됐다. 즉, 적의 침략의 의도를 정확하고 면밀하게 분석하여 허를 찌르는 외교적 제안으로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물론 후세에 거란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당시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거란을 물러나게 하고 오히려 영토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서희의 담대하고 뛰어난 외교적 수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진왜란 승리는 이순신? 그 뒤에 이덕형 외교력 한몫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외교력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란을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음 이덕형이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으로도 잘 알려진 이덕형은 이러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대 지식인으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인물이다. 1561년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벼슬을 지낸 이민성(광주 이씨), 어머니는 영의정 유전의 누이동생인 유 씨 부인이었다. 대단한 명문가의 자제였던 그는 임진왜란 발발 5년 전부터 3년 동안 조선의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당시 이덕형을 상대했던 일본의 승려 겐소는 그의 풍부한 학식과 인품을 존경했고 협상 파트너로 늘 이덕형만을 원했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그의 외교력은 빛을 발했는데 최초 부산포로 침략한 왜군이 첫 협상 제안을 할 때도 파트너로 지목했던 이가 바로 이덕형이었다.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의 외교적 난제는 명의 원군을 통해 왜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이덕형은 무엇보다 명나라의 원군이 급하였던 조선의 풍전등화 위기 속에서 비장한 각오로 명나라로 가서 명나라의 참전을 성사시켰다. 당시 임진왜란에 대해서 명나라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무엇보다 명나라 자체가 청(후금)의 성장으로 큰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무엇보다 임진왜란을 명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의 음모론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 조선을 돕지 않으면 훗날 같이 공격할 수도


당시 명나라의 병권을 쥐고 있었던 병부상서 석성과의 담판에서 이덕형의 외교적 수완은 빛을 발한다. 만약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훗날 왜군은 물론이고 조선군 역시 모두 왜군이 되어 명나라를 공격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강한 논리를 폈다. 결국 명나라는 조선으로 참전을 결정하게 됐다. 하지만 명나라의 황제가 참전을 허락했다고 해서 책임을 맡은 장수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당시 명나라의 참전 총책임자였던 장수 이여송은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로 조선을 무시했고, 병사들의 진입을 수차례나 미루었다. 또다시 이덕형은 당시 ‘한성판윤 접반관’이라는 직책으로 명의 총책임자인 이여송의 접대를 담당함과 동시에 그의 출정을 유도해냈다. 그래서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었고 결국 조선군과 명나라군 연합은 첫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임진왜란에서는 실제 전쟁터에서 싸운 이순신의 공도 크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명과의 협상과 원군, 나아가 종전을 위한 외교력을 발휘한 이덕형의 공도 엄청난 것이었다.

 

글_윤정원·진행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