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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고전 속 리더십 - 유능한 인재를 다루는 법

 

유능한 인재를 다루는 법

 

중종과 조광조 & 정조와 정약용

 

 

 

 

한때 같은 이상향을 꿈꾼 정치적 동반자이자, 때로는 숙청과 탄핵을 통해 유배를 명하고 처단하는 군신 관계. 마치 이별과 사랑을 반복하는 멜로와 같다.

 

군신간의 복잡 다양한 관계 중에서 유독 한때나마 크게 신임하고 뛰어난 역량을 갖춘 인재를 부하로 두었던 두 명의 군주에 대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상당히 유능한 인재를 발견하였을 때 진정한 리더로서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할 수 있는지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비교해보자.

 

중종과 조광조의 애증관계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키고 추대된 조선의 11대 왕이다. 조광조는 이렇듯 혼란스러운 시기인 1510년(중종 5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균관 유생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조광조가 초임되게 된다. 하지만 사실 조광조가 화려하게 등장하기까지는 중종의 의도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중종은 당시 비록 왕이었지만 자신을 추대했던 공신세력들과 쉽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 연산군의 폐위에 이어 당시 훈구세력들의 추대로 왕위 된 그였지만 부인이었던 신씨의 강제 폐위 등으로 새로운 기댈 곳이 필요했다. 신씨와의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는 각종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당시 정국은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이른바 반정 3인방으로 대표되는 정국공신들이 주도했지만 중종 8년경에 이들이 모두 사망하자 중종은 그 공백을 사림파로 메꾸어 공신들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기로 조광조가 중용되었고, 조광조와 중종은 한때나마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이상을 현실화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최고의 천재라고 평가받는 조광조의 다양한 개혁정치가 시도된다. 그는 성리학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불교적 성격의 기신재와 도교적 성격의 소격서를 혁파했고, 기득권이었던 훈구세력의 토지독점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자 50결 이상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과 노비 숫자의 제한 등을 주장했다. 훈구파의 경제침탈로 어려워하던 백성들이 당시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환호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조광조가 거리에 나갈 때면 그 앞에 서서 ‘우리 상전 오셨다’고 했다 하니 중종의 입장에서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 법도 하다.

 

 

왕의 권위 빼앗길까 열등의식… 결국 처단

 

아주 영민한 군주가 아니었던 중종이었기에 점점 커져가는 조광조의 위치는 불안했다. 또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이 모두 중종의 뜻에 맞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처음에는 신선하고 개혁적인 조광조의 철학에 동조하였지만 점차 왕 자신을 향한 비판과 잔소리가 많아지고 심지어 훈계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자 어느덧 중종은 조광조를 자신이 운영하는 국정에 있어 불편한 장애물로 인식하고 만다.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가 점차 불편해지면서 그들 사이에는 큰 벽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된다. 주목할 것은 최초 조광조의 개혁성을 토대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끌어들인 이가 중종 본인이었음에도 이러한 신뢰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는 데 있다. 어째서 그랬을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조광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 백성들 사이에서 얻어가는 덕망 등이 열등의식으로 번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 조광조의 오명은 잔인하고 냉정한 권력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숙청 과정에서 발생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 글귀 사건 등도 반대세력의 치밀한 전략으로 기획되었고, 조광조를 몰아내는데 절치부심하던 훈구파는 드디어 중종과 연합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의 특명으로 전격적으로 체포된 조광조는 국문에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라고 호소했지만 그 ‘임금의 마음’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소격서는 부활되었으며, 위훈삭제 된 공신들은 다시 복훈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다. 결론적으로 조광조와 중종, 그들 사이의 관계는 자신의 정치를 위해 서로를 끌어들인 단순한 정치적 동지애를 넘어서지 못했다. 아끼는 부하가 기고만장해지고 자신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열등의식, 한번 힘을 실어준 부하를 믿고 끝까지 가기에는 작았던 중종의 그릇이 결국 주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아끼던 인재를 처단하게까지 했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끝까지 믿는다, 정조와 정약용

 

리더의 관심과 후원이 유독 한 사람에게 쏟아진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질투와 견제를 받게 된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에서 부하를 신임하는 리더의 위험성에 대해 익히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신하가 비주류에 속하고 정치적인 힘도 약하다면, 사람들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지지 않을까. 정약용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흔히 정약용과 정조와의 인연을 떠올리면 ‘수원 화성 건축의 거중기’를 떠올려볼 수 있다. 거중기를 개발함으로써 공사기간을 1년 이상 단축시켜 당시 백성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는 정약용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백성을 사랑했던, 역사가들에게는 세종대왕보다 더 인정받는 조선 최고의 군주 정조. 정약용은 출신적으로 조정 내 극소수파인 남인이었으며, 나라에서 이단으로 배척했던 서학의 전력까지 있었으니, 주변 신하들은 그를 트집 잡아 더 크기 전에 꺾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약용의 공격에 대해 군주인 정조는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한번은 정약용이 과거시험의 부책임자가 되었는데, 당시 남인계의 합격자가 50명 이상이 나와 정약용이 일부러 자기 당파를 뽑은 것이라는 신하들의 탄핵이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정약용에 대한 신뢰를 모함 한 번에 버릴 만큼 옹졸함을 보이지 않았다. 추후 조사를 통해 정약용은 일소(제1고사장)의 시험관이었고 남인 합격자는 모두 이소(제2고사장)에서 배출된 것임을 확인해냈고, 허위사실로 그를 탄핵한 사람들을 오히려 징계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런 식의 모함은 계속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조는 정약용의 능력을 주변사람들에게 공인받게 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정약용을 높게 평가하고 중용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선호 때문이 아니라,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점을 주변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정조는 한밤중에 숙직하고 있던 정약용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대신들에게 이를 비평하도록 했다. 대신들은 이러한 비평을 통해 그의 놀라운 자질을 확인했지만 그에 대한 모함과 공격을 쉽게 줄이진 않았다. 계속되는 그에 대한 모함과 숙청의 교지 앞에 정조는 최후의 수단으로 문책성 처벌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반대파의 공격을 우선 피하게 하고, 하지만 실상은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다시 주게 하기 위해 ‘지방관 파견’이라는 방법을 강구했다. 결국 급한 공격을 피해 추후 중요한 시기에 다시 한양으로 불러올 명분을 삼으려 했던 것이다. 영리한 군주 정조의 입장에서는 정약용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를 시험해보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한번은 ‘승지’였던 정약용을 금정 지역의 ‘찰방’으로 강등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금정 지역은 서학이 급속도로 퍼졌던 곳으로, 정약용이 이를 막아낸다면 그에게 가해지는 서학의 전력이라는 비난은 힘을 잃을 것이라는 정조의 깊은 뜻이 있었다. 한번은 곡산 도호부사로 강등시킨 적도 있었는데 정약용은 정조의 뜻을 살려 빈곤했던 고을인 곡산을 풍요롭게 하는 공을 세워 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부하에 대한 믿음… 주변 견제 막아내기 위한 노력

 

역사는 결과만을 갖고 논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정조의 희망과는 달리 정약용을 향한 주변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그가 정승의 대열에 오를 만큼 현실적인 성공가도를 달리진 못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정조는 “그대를 중용하려고 하지만 의논이 분분하니 왜인지 모르겠다. 한두 해 늦더라도 괜찮다.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이 정약용에게 전해졌고 끝내 정약용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정조대왕은 승하했다. 정조가 위급하다는 급보를 들은 그가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고 정약용은 창경궁 앞에서 가슴을 치며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정조라는 거대한 보호막이 사라지자 그에게는 이내 위기가 닥친다. 남인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서학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그리하여 1801년 그는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종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결국 정조와 정약용의 브로맨스는 이렇게 끝이 났다. 행복한 결말이라곤 할 수 없지만, 정약용이 정조대왕 밑의 삼정승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조선의 부흥을 꿈꾸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조선 마지막 광영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인재를 바라보는 정조의 굳건한 믿음, 신뢰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리더가 처한 상황 중에서 다른 부하를 모함하는 반대파의 의견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소신을 갖고 믿었던 부하를 끝까지 신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어 닥치는 소나기는 잠시 피해 있으라’는 말처럼 그러한 위기로부터 가치 있는 부하를 보호해주고, 굳건한 믿음과 기회를 주는 것 이런 것이 리더가 갖추어야 할 소양은 아닐까. 중종과 정조의 달랐던 가치 있는 인재를 다루는 방법은 오늘날의 리더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진행_장여진 / 글_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