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고전 속 리더십 - 권력승계는 이방원처럼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가정을 원만하게 이끄는 자가 직장생활, 사회생활까지 순탄하게 이어갈 수 있음은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견훤은 통일신라 말기 사람이다. 전주 견씨의 시조이고, 아자개의 아들로 상주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신라에서 태어나 서남해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세우고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함락하여 경애왕을 살해한 후, 경순왕을 세웠으나 경순왕은 왕건의 고려에 투항한다.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성씨를 무시하고 왜 견씨가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고 아자개가 상주 성주였음에도 그가 서남해 지역 군졸로 시작한 것, 그리고 고려 초기 아자개가 견훤을 멀리하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점을 들어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가족 간의 불화에도 DNA가 있던가, 견훤은 그의 부자지간의 아픔을 자신의 아들들과의 관계에서도 극복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 후백제의 위기는 견훤의 왕위계승문제로 발생한다. 견훤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무예가 출중하고 무를 중시하였던 견훤은 아들들의 이름을 ‘검(劍)’자와 연관시켜 지었는데, ‘신검’, ‘양검’, ‘용검’, ‘금강’ 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에서 넷째인 금강을 특히 아껴 그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왕위승계는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아들들이 강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고, 결국 첫째 아들 신검이 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견훤이 없는 후백제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사실 신검은 견훤의 장자였지만 그가 나서는 전투마다 패배하는 등 견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장자 상속이 당연시되던 문화에서 그것도 배가 다른 막내 이복형제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것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임은 분명해보이나 신검이 후백제의 왕이 된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게 되니, 결국 그의 쿠데타는 후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견훤은 돌이켜보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아들에게조차 배신을 당한 역사상 찾기 어려울 만큼 흔히 말해 ‘핏줄의 복’이 없는 인물이다. 아버지인 아자개와의 관계도 그렇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상주의 호족이었던 아자개가 신라가 국가로서 기능을 상실한 당시 상황에서 의탁할 곳은 당연히 아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자개는 자신의 장남인 견훤이 후백제의 왕임에도 당시 견훤의 주적이었던 고려 왕건에게 귀부를 했다. 아자개와 견훤의 부자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던 점과 당시 혈연보다는 힘이 더 센 자가 우선인 시대로서 아자개로서는 후백제보다는 고려 왕건의 성장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고 볼 수 있겠다. 유추해볼 수밖에 없겠지만 견훤은 세력을 키우던 초기부터 아버지가 지방의 유력한 호족임에도 함께하지 않았고 남해안 지방의 해적을 소탕하며 직접 세력을 키우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때부터 비록 아자개의 입장에서는 견훤이 첫째 부인의 장자였지만 그의 건방진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둘째 부인을 총애하였기 때문에 부자지간의 사이는 너무 벌어져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결정적으로 자신을 떠나버린 아들이 훗날 어엿한 후백제의 왕이 되어 한반도 통일까지 바라보고 있었고 제대로 된 인사치레나 부모 대접이 없었으니 아자개의 입장에서도 아들인 견훤에게 남자로서 질투도 느꼈을 법하고 자식으로서 정보다는 실리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국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사로 유배된 견훤 역시 노년에는 도망쳐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하였으니 부자가 모두 왕건에게 노후를 맡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역사는 결과론적인 사실이지만 만약 견훤이 자신의 아버지인 아자개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힘을 받고 또한 아들들 간의 관계를 잘 정리해서 혈육 간의 쿠데타를 막고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했었다면 후백제가 쉽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 역사에서 가족 간의 문제가 흥망성쇠의 큰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이방원의
‘제대로 물려주는 리더십’
후백제의 견훤이 위 아래로 부자지간의 정리를 잘하지 못해 나라를 멸망으로까지 이끌었다면 이와 비슷한 인물이 바로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이다. 대하사극 ‘용의눈물’과 ‘정도전’을 통해 태종 이방원의 야심은 온 국민에게 단순한 역사를 떠나 강력한 카리스마의 마초적인 인물로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야망과 카리스마가 넘쳐났던 인물이다. 드라마 정도전 마지막 회에서 정도전을 죽이던 장면은 그의 호기어리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했던 권력에 대한 욕심, 카리스마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사실 이방원은 조선 초기 고려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지방호족의 사병을 혁파하여 중앙정부의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대신들을 견제하는 사간원을 독립하였으며, 왕실외척과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체계를 구축하는데 누구보다 기여한 왕이다.
업적으로는 누구보다 성공한 조선의 왕으로 후세에 평가받기도 하지만 그의 집권을 위하여 무엇보다 형제간의 잔혹한 칼부림을 두 번씩이나 겪어야 했던 비정한 왕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사실 이방원이 아닌 여덟 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에게 세자의 스승을 맡기는 등 왕위승계를 위한 계획을 착실하게 실현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과 그의 아들들이 정도전을 숙청하고 세자인 방석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라 일컫는 첫 번째 혈육 간의 칼부림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자신의 바로 위 형 방간과의 권력다툼으로 두 번째 왕자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형 정종에 이어 결국 조선의 3대 임금으로 재위에 올랐다.
견훤처럼 부자지간이 원만하지 않았던 이방원이었지만 그의 아들을 왕위 계승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견훤보다는 훨씬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조선의 성군 세종의 등장과도 맞물리는 이야기다. 오늘날 세종대왕으로 칭송받고 한글을 만들고 백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성군은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방원은 비록 아버지 이성계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자신의 힘으로 형제간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 끝에 왕위를 차지했지만 그만의 리더를 만드는 육성법은 남달랐다. 세종대왕이라는 역사적 성군을 만들기 위해 이방원은 악역을 자처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보면 ‘인정전’의 공사와 관련하여 당시 병조판서인 박신이 백성들에게 고통이 되는 공사는 다음 왕이 즉위하고 천천히 계획하고 진행함이 옳다고 하자 “토목공사는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부리는 짐은 내가 안고 세자가 즉위해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하여 민심을 얻게 하여라”고 한 내용이 나온다. 그것뿐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세자였던 세종과 관련한 일화 중 “누구든 세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이가 있거든 비록 초야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물리치지 말고 들게 하라. 세자로부터 깊은 인심을 얻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자신은 비록 덕(德)의 측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리더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자식만큼은 인정받고 백성을 아끼는 지도자가 되게 만드는 훈육방법, 또한 태종 시절에 극심했던 외척세력 및 공신세력들의 숙청의 연속도 어찌 보면 후세에 굳건한 왕권을 물려주기 위한 지도자로서의 노력, 희생이 묻어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참된 후세 육성에 필요한
‘책임’과 ‘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