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도 당당한 리더가 돼라
마지막 군주의 빛바랜 노력들
백제와 조선의 마지막 리더였던 의자왕과
고종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리더십을 살펴본다.
의자왕은
과연 무능했을까
700년 백제의 역사, 우리는 우리 민족문화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백제를 최우선으로 떠올린다. 그만큼 백제인의 품격은 우아했고, 문화는 오늘날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했다. 근초고왕 시절에는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략할 만큼 기상 또한 웅대했으며, 일본에 문물을 전해줄 만큼 국가의 품격은 대단했다. 백제를 말할 때 떠오르는 이가 있으니 바로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백제의 제31대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성은 부여씨며, 이름이 의자다.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향락에 젖어있던 망국의 왕. 바로 의자왕이 떠안게 된 숙명과도 같은 이미지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신라와 대립했던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그의 묘사가 인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과연 그는 그렇게 무능한 왕이었을까? 《삼국사기》에는 당시 의자왕이 사치스럽게 생활하며 향락에 빠져 나라에 변고가 잇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은 기록이 전해질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였던 의자왕. 과연 그가 그렇게 무능하고 향락에 빠져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을까?
물론 국왕의 신분으로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군주에게 후세의 평가는 인색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리더의 자리는 책임이 뒤따른다. 하물며 군주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필자 의자왕의 향락에 빠진 실정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국가가 멸망에 처하게 된 위기의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발버둥 쳤던 그의 노력을 되짚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의자왕을 무릎 꿇게 한
‘예식진’의 반란
2007년 중국 서안에서는 묘지 하나가 발견된다. ‘예식진의 묘’다. 바로 조부 때부터 백제의 좌평을 지낸 예씨 집안 출신의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묘비로, 발견된 묘비에는 의자왕의 마지막을 추리해볼 수 있는 몇 가지 구절이 발견되었다. ‘예식진이 세운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적혀 있는데,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으로 중국에서는 이민족 출신의 장수가 공을 세울 때 흔히 비교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중국(당시 당나라)의 땅에서 백제 출신의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큰 공을 기리는 묘비가 세워졌을까. 바로 묘비에 세워진 하나의 문장 ‘예진이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하다(基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라는 문구를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예진은 예식진을 뜻하고, 두 번째로 쓰인 將이라는 글자에는 ‘누군가를 강제로 데리고 가다’라는 뜻이 있어, 예식진이 의자왕을 잡아 당나라에게 항복하게 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의자왕은 향락과 유흥에 빠져 있던 색을 탐했던 군주였을지 모르나, 위기에 처했을 때는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마지막까지 해결책을 찾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담력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과감히 사비성을 버리고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갔다. 당시 백제의 지방군은 건재했기 때문에 적군의 보급로를 끊고 사비성을 역으로 포위하려는 전략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의 나라 백제의 특성상 지방 호족들이 왕의 말을 잘 안 따르긴 했지만 국가의 멸망까지 방치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을 벌어 지방군을 응집하고 역으로 공략하고자 했던 당시 전술은 상당히 수준 높은 전략으로 볼 수 있다. 20만에 달했던 당시 ‘신라-당나라’의 연합군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보급이 큰 문제였고, 사비성이 수비에 약했던 사실은 역으로 생각하면 함락시키기도 쉬운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군을 동원해서 보급로를 끊고 전력을 결집한 후 사비성을 포위하고자 했던 전략이 통했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의자왕은 웅진으로 들어간 지 5일 만에 당에 항복하고 만다. 시간을 벌어서 지방군을 응집한 뒤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던 계획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결국 내부 ‘예식진’이라는 장수의 반란이 의자왕으로 하여금 허탈하게 항복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국가가 멸망하는 상황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의자왕의 노력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신라중심의 역사에 가려져 그저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삼천궁녀의 왕’, ‘유흥과 향락에 빠져 있었던 무능한 군주’라는 오명만 남게 된 의자왕, 물론 어느 부분에서건 완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비난받고 향락과 무책임의 대명사로 기록되기에는 많은 부분 의심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기억하는 삼천궁녀의 오명도 자칫 역사적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당나라의 역사서 《주서》에 따르면 당시 백제의 멸망 당시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이었으며, 연소자와 노약자를 뺀 성인 여성은 약 1만 5천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비성 성인여성의 약 20%가 궁녀였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천년 후로 인구가 성장하고 왕권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던 조선시대 후기에서조차 궁녀 수가 약 500명 정도였음을 비추어보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인지 유추할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의자왕의 오명을 벗겨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리더의 입장에서 되새겨보면 조직이 어렵고 붕괴되기 직전에 나름대로의 전략을 갖고 반전을 시도했던 담력 있는 지도자, 그것이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본연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무능력한 리더로
남겨져온 고종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이었다면 최근의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떠오르는 인물,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바로 실질적인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을 떠올릴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이자 명성황후의 남편, 흔히 대하드라마에서 아버지와 부인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함의 절정을 보인 무능력한 군주가 실질적인 조선의 마지막 왕,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다. 어느 국가나 멸망에 가까워질수록 왕권이 약화되고 외세의 침략이 들끓는다. 바로 그런 시기에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젊어서 미친 척까지 하며 본인의 야망을 숨겼고, 어린 아들을 결국 왕위에 올리자 수렴청정을 통해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이후 고종이 장성하여 국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을 때는 아내이자 황후인 명성황후의 내정참여에 자신만의 정치를 펴지 못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너져가는 국가를 일으키지 못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와 부인 사이에서 어깨 한번 펴지 못하고, 조율하지 못한 무능력한 리더, 과연 고종은 그런 지도자였을까?
고종과
헤이그 특사
고종의 죽음에 대해서 독살설이 나올 만큼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고종은 빠르게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야할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왜 그렇게 못난 리더를 왕의 자리에서 내리고 죽여야만 했을까. 고종 퇴위의 결정적 사건이었던 ‘헤이그 특사 사건’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그가 얼마나 조국의 독립과 국가로서의 위상을 다시 찾고 싶어 했는지 여실히 알려주는 대목이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만주와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두 나라 간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토대로 일본은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을 시작했고, 1905년에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버렸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는 사실상 국가가 아니었다. 이대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수 없었던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세 명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함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했다. 철통같은 감시와 언제 독약을 음식에 탈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당시 무너져가는 국가의 군주로서 그저 쉬운 결단이었을까? 무능력하고 국가의 몰락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왕, 그저 아버지와 부인에게 휘둘리는 그저 그런 지도자였다면 이러한 의기 있는 시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애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보낸 세 명의 특사는 정식초청장이 없다는 공식적인 이유와 실제로는 일본의 강력한 반대와 훼방에 의해 회의 참가를 거부당한다. 그리고 얼마 후 고종은 그 사건을 계기로 강제 퇴위 당했고, 혹자들이 얘기하는 독살설이 언급되는 정황만 남긴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쓸쓸한 망국의 왕, 리더의 뒷모습. 우리는 흔히 역사 속에서 최종 결말에만 심취한 채 과정을 무시하고 역사가 남긴 승자의 기록만을 진실로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의자왕과 고종 모두 마찬가지다. 특히 고종의 노력들이 폄훼당하고 저평가 되는 것은 일종의 친일적 시각에 근거한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나라가 망했고 최고의 리더가 거느리는 조직이 붕괴했다. 조직의 리더로서 국가의 군주로서 조국을 지키지 못한 대가. 물론 그 대가를 절대 가볍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왕, 아니 적어도 리더로서 조직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던 힘겨운 모습들은 기억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존망을 유지시켜야 하는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리고 조직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든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물론 그 노력의 대가는 의자왕이나 고종처럼 역사적 오명이나 혹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쓸쓸한 길일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당당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_윤정원 · 진행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