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어떻게 정권을 잡았나?
선동열과 최동원, 김영삼과 김대중. 스포츠 스타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동시대를 풍미했던 양대 강자 또는 선의의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을 이른바 ‘라이벌’이라 한다.
주연보다 더 재밌는
라이벌 조연들의 이야기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 ‘위화도 회군’이라는 역사의 획을 긋는 사건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을 야기했다. 위화도 회군이 조선건국의 핵심적인 사건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당시 권력자들 간의 관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구세력으로 대변되는 최영의 몰락과 신세력으로 급부상한 이성계의 성장이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다. 우선 그만큼 두 사람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몇 년 전 KBS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와 최영은 유동근 배우와 서인석 배우라는 선이 굵은 연기파 배우가 역할을 맡으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드라마 주인공은 정도전 역할의 조재현 배우였음에도 정도전(조재현 배우)보다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이성계(유동근 배우)와 꿋꿋하면서도 무장으로서의 특유의 고지식함이 강조된 최영(서인석 배우)의 존재감이 워낙 컸다. 당시 주인공 역을 맡았던 조재현은 최영과 이성계, 이인임 등의 조연들만 유달리 부각되는 것을 두고 작가와 연출진에게 큰 서운함을 가졌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만큼 조선의 건국에 정도전의 역할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던 이성계와 최영의 이야기는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최영과 이성계는 어떤 점에서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 되었고, 또 어떤 인물적인 차이점이 있었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들의 캐릭터적인 측면을 토대로 리더로서 되새겨봄직한 덕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성계가 최영보다
승자로 기록되는 비결
최영은 고려의 명장이자 충신이다. 1316년 출생하였으니 이성계보다는 19살 위이다.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고,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그만큼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공을 세웠던 최영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따를만큼 청렴함으로도 유명하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을 감행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된 채 이성계에 의해 숙청,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반해 이성계는 변방의 흔한 장수에 불과했다. 고려 충숙왕 복위 4년(1335)에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무예, 활솜씨 등으로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공민왕 때 벼슬길에 나아간 후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하여 흩어진 민심을 수습했고, 최영에 의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으며 그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다. 당시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무엇보다도 심했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써 조국을 지키는 충절로 뭉친 장수이자 동료였기에 그들의 의리와 우정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이다.
고려 말은 시대적으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권문세족은 고려중기 이후 원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고려에 형성된 전통적인 귀족집단이고,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 성리학의 도입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신흥세력이었다.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이 있듯 이 당시 새로운 신진사대부의 등장은 권문세족에게는 큰 위협이자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최영과 이성계,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 일컫는 그들을 승자와 패자로 나눈 캐릭터적 차별점은 무엇일까? 단편적인 성향의 차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리더로서의 차이는 당대 최고 무장의 명암을 가르는 큰 요소가 되었음에는 충분해 보인다.
1. 새로움에 대한 인식 차이
고려 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충돌, 기득권과 신진세력의 갈등 속에서 신진사대부를 대하는 관점은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보인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지만 새로운 집단문화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당대의 획을 가르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우선 권문세족의 대표 수장인 최영은 신진사대부에 대해 그렇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핍박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여타 귀족과 같은 모양새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 최영은 당시 기득권이었던 권문세족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고 편향된 시각을 가졌다. 이런 점이 새로운 신진세력의 입장에서는 그를 차세대 리더로 받들기에 무엇보다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고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학문적 소양을 그들을 통해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정몽주와 정도전과 같은 대표적인 신진사대부들과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즉, 기존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최영에 비해 기존 권력과 새로운 도전에 대해 균형적인 제스처를 취했던 이성계의 차이가 신진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로 하여금 그의 손을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리더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청렴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부정함이 없었던 최영이었지만 기득권을 유지하고 전통 기득권을 비호하는데 급급하였던 것에 비해 새로움, 도전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점이 그로 하여금 이성계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부하들을 다루는 방법의 차이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기처럼 외부의 침략이 많았던 시기는 없다. 몽골의 침략에 이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까지 일어나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지고, 도적이 늘어나던 시기였기에 군사력을 갖춘 무장의 권한과 카리스마는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따를 수 있는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 말의 혼란은 자연스럽게 무장 세력의 개별적인 성장을 가져왔는데, 중앙정부가 군사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장수들이 각기 군사를 점유해 사병(私兵)처럼 거느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급부상한 최영과 이성계는 출신 배경은 물론, 고려에 대한 충절과 휘하 군사들에 대한 리더십 등의 측면에서 상반된 점이 많았다. 최영은 개국공신을 비롯, 평장사 최유청 등을 배출한 고려를 대표하는 귀족가문인 철원 최씨 출신이었던 것에 반해 이성계는 고조 이안사 때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이주해 세력을 키운 뒤 부친 이자춘이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호응해 공민왕에게 발탁된 신흥무장 세력이었다. 즉, 최영이 전통적인 고려 귀족의 금수저 격이라면 이성계는 드라마 정도전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함경도 사투리에 어울릴만한 ‘촌뜨기’라고 하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그들의 신분적인 배경 차이가 아니다. 바로 군사를 다루는 방식, 리더로서의 스타일의 차이다. ‘고려사’에 보면 “최영은 군사들을 지휘했지만 휘하의 사졸 가운데 그(최영)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십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군사들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곧 참형에 처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 구절만 봐도 그의 스타일을 알 수 있다. 즉 부하들 대다수가 그의 얼굴을 몰랐다는 것은 군사들의 사병화가 일반적인 현상인 당시 상황 속에서도 최영은 군사들을 최대한 공식적인 조직이나 편제를 통해 지휘하였고, 무엇보다 최영과 군사들 사이에 서로 쉽게 친화될 수 없는 어려움이 존재했을 것이란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장병이 싸움에서 물러서면 바로 참형에 처했다고 하니, 용맹과 추진력은 칭찬할만하나 용병의 측면에서 얼마나 융통성이 없는 부분인가. 이에 비해 당시 가장 사병적인 성격이 강했던 북방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이성계는 군사들과 허물없이 잘 어울리고 격의 없이 대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이성계는 홀로 휘하의 사람들을 예절로써 대접했고 평생 꾸짖는 말이 없어 모두 그에게 소속되기를 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서술 외에 단순한 위화도 회군, 성향이 달랐던 정도전이나 정몽주와의 소통, 포용정책을 보더라도 그의 인품이 후덕했음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이들의 리더십, 용병술의 차이를 조직생활에 적용시켜 본다면 조직의 입장에서는 최영과 같은 충성심 있는 직원이 이성계 같은 조직원보다는 나을 수 있겠으나 조직을 이끌 리더의 입장이라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토대로 평생 동안 청렴과 고지식함으로 대변되는 최영보다는 휘하 군사들을 각별하게 대우하는 등 어느 장수보다 결속력이 강한 군사력을 보유해 역성혁명을 이끌어낸 이성계가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시대를 선도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자세, 부하를 부리는 사소한 리더십의 차이가 이성계와 최영의 명운을 가른 운명의 기준점이 되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글 · 윤정원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 행정학 박사 / 수원시정연구원 연구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