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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발행인칼럼 - 한민족 DNA를 깨우자


한민족 DNA를 깨우자




항일운동의 터전, 연해주

지난 6월 28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새마을 지도자들과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롭스크를 다녀왔다. 고려인 이주 80주년을 맞아 우리민족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느껴보기 위해서다. 강원도 양양서 출발한 비행기는 ‘수호이’라는 러시아 전투기 개발사에서 만든 민간항공기로 조종사들의 실력이 좋아 안전하다는 평이었다. 처음 만난 곳은 블라디보스톡. 러시아의 극동지역으로 북한 영토 위쪽 연해주라 불리는 곳이다. 
처음 러시아를 방문한다고 했을 때는 예전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이미지 때문에 친근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사람들도 다정다감하고 거리도 아름다웠다. 광물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안정된 러시아의 국력도 느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인 1863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함경도의 13가구가 달구지를 타고 이주했고, 나라가 혼란하던 19세기 말부터 1910년경까지 많은 사람들이 옮겨갔다. 특히 일본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애국지사가 연해주를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고 활동했다.
 
영화같은 삶, 최재형



블라디보스톡에서 한두 시간 거리인 우수리스크는 한인이주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헤이그 열사 중 한 분인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와 연해주 거점 독립운동의 중심축이었던 최재형 선생의 생가가 있다. 최재형(1860~1920), 그의 이름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오히려 안중근하면 모두가 알 것이다. 실은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를 위한 모든 경제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분이다. 러시아에서 만난 최재형의 삶은 마치 한편의 영화 같았다. 나는 끓어오르는 눈물인지 뜨거움인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함경도 기근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열두 살의 소년. 배고픔으로 쓰러진 최재형은 러시아 부두에서 한 선장에게 발견된다. 러시아 선장은 이 소년을 아들로 키웠고, 양아버지 덕분에 당시에 이미 세계일주를 두 번 하는 등 최고급 교육을 받는 재원으로 자랐다. 러시아군대에 군납을 하는 거상이 돼 그 지역 최고 관리자까지 올랐다. 그는 공사를 따내면 조선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조선인을 보호해줬다. 이런 그에게 일제에 항거하는 동지들이 찾아왔고,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의 집에서 항일결사동의회가 조직되었고,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에 성공했다. 그는 안중근을 죽음으로부터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이후 안중근의 가족들을 거두고 보살폈다. 당시 그가 가진 재력과 명예는 러시아 국적인 그가 평생 편안히 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보다 조국을 위한 의롭고 힘든 길을 택했다.
러시아로까지 세력을 뻗친 일본은 1920년 4월 한인 300여명을 학살했다. 최재형도 우수리스크에서 총살되며 최후를 맞았다. 안중근과 최재형의 시신은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 선생 생가가 지금 복원 중에 있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스탈린정권은 한인 강제이주를 결정하게 된다. 어디를 가든 가장 머리 좋고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을 간파한 스탈린은 이 한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해 흩어지게 했다. 1937년 8월부터 10월까지 중앙아시아 8개 지역으로 총 17만명의 고려인들이 강제로 옮겨졌다. 러시아 횡단열차에 실린 한인들의 공포와 굶주림은 엄청났다. 이주 과정 중 7,000명, 그 다음해에 5,000명이 죽었다. 종착역은 러시아에서 가장 춥고 곡식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다. 한인들은 동굴을 파고 생활하면서도 가져온 볍씨로 농토를 일구었다. 러시아인들은 감히 생각 못할 대풍작을 거두어 나중엔 소비에트 최고의 우수농장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조국이 돌봐주지 못해도 그들은 한국인답게 강하게 살아남았다. 러시아 현지에서 만난 한 고려인 여인은 “지금은 러시아 사람보다 고려인들이 더 잘 산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한국인임을 이처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열심히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이겨나가는 한국인이다. 세계에서 유태인을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 현지에서는 유태인보다 한국인이 더 강하고 우수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편한 길로? NO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물질적으로 풍부해진 우리가 그런 고난의 역사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아픔을 이겨내는 그 강한 DNA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적당히 하자는 말이 종종 들린다. 안 되는 것은 원래 안 되는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1937년 고려인들이 화물열차를 타고 강제 이주되면서 적당히, 또는 이제는 안되겠다고만 생각했다면 지금처럼 고려인들의 자취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고 삶의 터전을 이루는 극단의 노력을 하며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일원에 한민족의 강인한 DNA를 심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상황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되는 방법을 찾는다. 전문가를 찾고 연구를 하면 진짜로 되는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경영자가 긴박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고 매년 쉬운 결정만 내린다면 저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최근 어느 강의에서 들었다. 항상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속에 있는 우수하고 강인한 DNA를 다시 한 번 돌아봤으면 한다. 고난과 위기도 경영자에게는 하나의 스펙이 될 수 있다.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어려움을 이기고 고난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한민족의 강인함을 일깨우는 길이다. 다시 한 번 세워보고 다시 한 번 일어나자. 어려움을 이겨내 하나씩 이뤄가는 것, 이것이야 말고 가장 한국인다운 DNA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