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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책임

 
 
 
 
 
나의 가장 무서운 선생님 ‘책임’ 

 
 


 
 
 
에누리를 
하지 
않습니다

 
1971년 2월 해군에서 제대한 후, 대구 북부 원대주차장에서 공구행상을 시작했다. 자전거에 공구를 싣고 시외버스 기사들에게 ‘공구 필요하지 않습니까?’하는 인사를 하며 공구를 팔았다. 당시는 차량고장이 잦아 시외버스 한 대에 운전기사와 차장 그리고 뒷문에는 조수가 따라다녔다. 운행 중간에 고장이 나는 경우도 많았고, 특히 종착점에서는 아예 버스기사와 조수가 예비수리까지 해야 했다. 그러니 차에는 웬만한 공구를 다 갖추고 있어야 했고, 수리 후에 나오는 폐 부품을 뒷자리 시트 밑에 싣고 다니기까지 했다. 나의 목적은 공구 판매에도 있었지만, 공구를 갖다 드리고 대신 헌 부품이나 고철을 받아오는 데 있었다.
당시 상인들은 가격을 좀 높게 불러서는 적당히 에누리를 해 주었다. 흥정을 붙여야 장사를 잘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다보니 마음씨 좋은 사람에게는 값을 더 받고, 깐깐한 손님에게는 가격을 낮추어 파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비록 행상이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받을 값만 받자’ 생각하고 더도 덜도 말고 딱 받을 만큼만 불렀다. 처음에는 고객들의 반발이 심했다.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며 물건을 살 듯 하다가도 흥정이 깨져버렸다. 그렇게 몇 차례 지내면서 ‘저 사람은 에누리없는 사람’이라는 평이 나기 시작했다. 흥정을 하지 않으니 에누리하느라 밀고 당기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오히려 서로 신뢰하며 거래하게 됐다. 나중에는 판매가 늘어났다. 내가 부르는 가격이 정찰이 되니 장사가 한결 쉬워지고 간단해졌다.
또 당시는 참말만 해가지고는 장사를 할 수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재생품이나 가짜 상품은 팔지 않았다. 이런 상품은 한 번 팔면 고객과의 마찰도 생기고 지속적인 거래를 만들기 어려웠다. ‘내가 비록 행상을 할지언정 나중에 큰 장사를 할지 아는가. 현재의 이익만을 위해 이러면 안된다’ 생각하고는 꼭 참말만 하고 팔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시간약속을 엄수했다. 버스가 지방에 갔다 돌아오는 시간이 있는데 시간에 맞춰 이동해야 하는 버스인지라 그 시간을 꼭 지키기로 했다. ‘몇 날 몇 시에 차가 들어오니 그 때 무슨무슨 공구를 가지고 오시오’하는 주문을 받으면 그 시간을 엄수했다. 
이처럼 공구상을 시작할 당시 나의 무기는 세 가지였다. 
1. 받을 값만 받는다.
2. 정품을 팔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 고객과 약속한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내 이름은 ‘책임’… 
조금만 잘못하면 
無책임

 
어느 정도 소문이 나면서 당시 원대주차장에서는 나에게 이름이 붙여졌다. ‘책임보장’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해 12월에 빚을 좀 내서 점포를 갖고 간판을 달게 됐다. 무슨 이름을 지을까 고민하며 고객들(버스기사, 조수, 차장)에게 물어보니 ‘당신 이름이 책임보장인데 그게 간판 아니냐’ 말해주었다. 이래서 책임보장공구사가 태어나게 되었다. 
말로써 책임보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닐 때는 좀 잘못해도 그렇게 책임질 만큼은 안 되었다. 그러나 간판에 책임보장공구사라는, 책임진다는 이름을 달고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상품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까지도 조금만 잘못해도 고객들이 무섭게 채찍질을 해댔다. 상호 앞에 無자를 붙여 ‘무책임’이라 몰아부쳤다. 장사하는 이에게 무책임이라는 말은 아주 무서운 것이었다. ‘책임 간판을 떼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한 번 붙여진 이름을 떼기가 어려웠고, 또 이미 내 이름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내가 책임지고 할 수 있을까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사업을 해나갔다.
30여 년 전인 1987년, 어느 정도 규모가 되자 표준가격표를 만들었다. 순전히 ‘책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가격을 공개적으로 오픈하기가 힘들었지만, 그 일로 우리업계에서 표준가격을 정하는 기초가 됐다. 한국의 공구가격이 그때 이후로 세워지지 않았나 한다. 시간을 지킨다는 약속도 꼭 지켜야했다. 규모가 커지고 관리부분이 넓어지면서 점점 힘에 부치기도 했다. 나의 지식과 기술로 감당이 안 될 때는 외부인력에게 도움을 청했다. 컨설팅을 여러 번 받았고, 잘하는 곳이라면 국내외 가리지 않고 벤치마킹하러 다녔다. 특히 물류분야는 일본의 TRUSCO사를 많이 연구하고 배우기도 했고 2004년에 바코드를 만들어서 물류에 접합시켰다. 2006년도에 CTX(전자주문 시스템)를 성공시켰다. 2010년에 전산을 업그레이드해 오늘날 앞선 기술에 또 맞췄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고객이 ‘약속을 지켜라.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냐’라며 채찍질 해준 덕분이다.
내가 나를 가만히 보면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책임’이라는 간판을 달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 간판을 건 이후로는 나만 아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부족한 나의 밭에 
‘책임’이라는 
씨앗

 
“과거에는 정직하면 돈을 벌지 못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제는 정직해야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착한 기업이어야만 성공할 것이다.”- 라젠드라 시소디어  美벤틀리 대학 교수 -
“기업은 사주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거나 사원이 오직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종사하는 곳이 아니다. 기업은 인류 사회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전달되도록 헌신해야 한다.” - 남양알로에 이연호 창업주 -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이기적인 나에게 세상은 ‘책임’이라는 씨앗을 주었다 싶다. 부족함을 메워 세상에 도움을 주라는 명령 같다고 할까. 그때 만약 그 간판을 걸지 않았다면 조그마한 상인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이 ‘책임’이라는 간판이 가격, 품질, 배송에서 약속을 지키고 배신하지 않도록 큰 말뚝 하나를 박아놓은 게 아닌가 한다. 평생 동안 가장 무서운 선생님을 모신 셈이다.
나의 밭에 심어진 ‘책임’이라는 씨앗에 감사드린다. 훌륭한 농부는 가장 볼품없는 것은 먹고 크고 좋은 것은 종자로 쓴다 한다.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종자, 지금은 힘에 부치더라도 미래를 밝혀줄 씨앗이 무엇인지 이 봄날 살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