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편지
편지
대통령님 전상서
1972년 6월, 공구상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목은 몽키, 플라이어, 스패너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없었다. 몽키는 미국제 물건이었고 정식수입도 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불법유출된 것뿐이었다. 중고제품인 경우 장물도 허다해 잘못 취급했다가는 경찰조사를 받아야 했다. 재생품 몽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새 몽키인 줄 알고 사갔다가 몇 번만 쓰면 부러져서 상인들과 싸우곤 했다. 당시 일본과는 무역허가가 나지 않아 일본제품은 활어선 등을 통해 들어왔다. 이 또한 불법이었다. 일본제품이든 미국제품이든 법적으로 따지고 들면 걸리지 않는 것이 드물었다. 장사를 하려니 걸림돌이 너무도 많다 싶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공구를 만들지 못하나? 왜 모두 외산몽키라서 이렇게 장사하기 어렵나?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 자본은 없었지만 용기는 많았다. 큰맘을 먹고 청와대에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저는 대구 원대동에서 책임보장공구사를 운영하는 25살 최영수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공구가 생산되지 않아서 미제나 일제공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충분히 몽키나 스패너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책임지고 공구공장을 만들겠습니다. 철공소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고, 해군에서 3년간 기계장비를 운영해봤으며, 공구상도 해보아서 어디에 무엇이 쓰이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공업 발전을 위해서 제 젊음을 바쳐서 국산공구를 생산하겠습니다. 저에게 꼭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 1972년 6월 ○일 최영수 올림 -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물론 답장은 받지 못했다. 국정업무로 바쁘셔서 답장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대신 누구도 못할 우리나라 국토개발이나 산업발전을 이뤄주시니 그보다 몇 배 다정한 답장을 받았다 생각한다.
저를 채용해주십시오
1978년 1월 대구 변두리인 북부정류장에서 공구상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주로 시외버스에 공구를 팔았는데, 당시 버스가 개인 차주제에서 회사운영 체제로 바뀌면서 공구사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 도로도 좋아지고 차도 좋아지니 차량 고장도 줄어들었다. 공구사용도 같이 줄어들었다. 버스를 상대로 하는 영업에 한계를 느끼며 이제 옮겨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문득 든 생각 하나.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더 크게 배우고 내 능력도 나타내보자’ 아예 점포를 접고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워보리라 생각했다. 당시 이미 전국적으로 사업을 잘하는 대구의 상명상사 전명열 사장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께 편지를 썼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무한한 꿈을 가지고 공구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도 느끼고 더 배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귀사에 근무할 기회를 주시면 현재보다 몇 배 더 크게 사업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무한한 꿈과 용기를 가진 저를 채용해주십시오.
세세한 내용은 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용감무쌍한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만은 분명하다. 답장은 없었다. 후일 들었는데, 업계 내에서 이 편지가 돌아 아는 사람은 보고 웃었다고 한다. 개의치 않는다. 내 젊음의 징표니까.
답장이 없자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1978년 3월, 이번엔 서울 신흥상사 송용순 사장님께 편지를 썼다. 몇 번의 무응답을 겪은 나는 조금 소심해졌는지 내 이름 석 자는 빼고 보냈다. 편지를 보내놓고 사업차 몇 번이나 신흥상사를 가서 눈치만 보기도 했다.
이 기억의 비밀 상자는 30년 후 열렸다. 내가 한국산업용재협회장이 되고 나서 송용순 회장께 그 편지 이야기를 털어놨다. 송 회장님은 잘 기억한다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편지의 주인공을 찾았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날 웃고 또 웃으며 공구업에 함께 몸담은 끈끈한 정을 느꼈다.
나에게 쓰는 편지
청와대에 편지를 또다시 쓴 것은 2002년 1월이었다. 산업공구 카탈로그 7판 720페이지짜리를 만들어놓고 ‘우리나라 산업공구 카탈로그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어 편지와 함께 책을 보냈다. 발전된 조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담아서였다. 마침내 비서관으로부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연락이 와 감개무량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나는 힘들 때마다 편지를 썼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낄 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내 하소연이기도 했지만, 다시 보면 당시 막막하고 힘들었던 나에게 보낸 응원의 편지였던 것도 같다. 편지를 쓰면서 나 스스로 일어서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봄이 온다. 겨우내 언 땅 밀치고 새싹이 돋아난다. 두터운 나무껍질 속에서 새움이 싹틀 것이다. 미제 몽키를 팔던 청년이 예순아홉 봄날을 맞이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고 나 또한 이만큼 일할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더 좋은 나라, 더 발전된 세상을 위해 이 봄, 다시 한 번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이 봄, 한발 더 도약하는 업계가 되었으면 한다.
생각을 하면 바로 행동하던 청년정신을 한 번 더 가지고 싶다.
젊은 날의 용기와 무모함, 그것이 오늘을 만든 것을 잊지 말자.
봄은 도전의 계절, 마음 속 청년에게 나는 편지를 쓴다.
솟구치는 봄의 정신으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