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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실패는 정말 실패일까?



실패는 정말 실패일까?


복 많은 사람
 

누구나 살아온 것을 돌아볼 때면 좋은 것만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좋았던 추억, 사랑한 시간들을 말하고,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내용물이 다르다. 실패를 수도 없이 많이 해서 남보다 인생을 진하게 살았기 때문에 복이 많은 사람이다. 오늘은 실패한 것에 대해 추억하고자 한다.
1960년, 초등 6학년, 그때 이미 우리집은 실패 투성이었다. 첫 번째 실패의 시작이다. 아버지가 하시던 정미소 사업이 쫄딱 망해 우리집은 이불보따리 하나만 들고 대구로 이사를  왔다. 양동이를 받쳐두고 빗물을 받던 집. 아마 당시 이 도시에서 우리집은 가난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이었을 게다.
두 번째 실패는 원하던 중학교 진학이 안 된 것이었다. 당시 경북중을 목표로 했는데, 꽤나 공부를 하던 나는 도시 아이들의 학력에 눌려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잘한다는 경상중으로 진학했다. 그때 내가 경북중을 갔더라면 그 유명한 경북고로 진학해 경고 동창이 되었을지 누가 아나. 그런데 인생이 그렇지 못했다. 경상중을 가서도 공부를 잘하기는커녕 집안이 편하지 못하니 아마 잡생각만 많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철공소에 취직했다. 여기서 세 번째 나의 실패가 온다. 철공소에서 선반공 일을 배워 기술자로 먹고 살 길이 보이나 했는데, 우연찮은 일로 2년 8개월만에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와 한 직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또래 아이들에겐 곱지 않게 보였는지, 도저히 계속 일할 형편이 못되었다. 철공소 견습공 일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무얼 하고 먹고 사나….
 

잘 나가도 코 깨지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마침 아버지 친구가 인교동에서 공구 노점상을 하고 계셔서 그 옆에서 팔아보라고 길을 터주셨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의 나무판에 공구를 진열했다. 8개월간은 장사가 꽤 잘 되었다. 북성로의 점포보다 내가 더 잘 판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잘 나가면 코 깨진다고, 물건을 잘못 산 죄로 경찰서로 연행이 됐다. 어떤 장수로부터 산 중고공구가 장물이었던 것이다. 변호사비 등으로 빚만 졌다. 장사 좀 해서 먹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결국 여기서 막혔다. 이것이 네 번째 실패다.
기술을 배우려고 해도 안 돼, 장사를 배우려 해도 안 돼, 뭐 하나 시원하게 잘되는 게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재수가 없다. 되는 일이 없다’고 술 마시고 화풀이를 하거나 실의에 빠져 누워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벌떡 일어나 또 하고 또 하고, 저녁에 힘들어도 아침이면 툭 털고 일어나는, 그게 나였다.
1979년,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8년쯤 지나 대구변두리에서 북성로로 이사를 왔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만 사서 팔아도 꽤 돈이 남았다. 당시 공구상들은 미군부대 뒤로 나오는 물건을 불법인 줄 알면서 마진 재미에 눈독을 들일 때였다. 이 맛에 원래 하던 도매 소매 납품 같은 정식장사에는 관심이 멀어졌다. 1979년 부산세관에 딱 걸리고 말았다. 사건을 해결하다보니 이제까지 벌어놓았던 돈 이상을 까먹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나의 실패다.
 

실패를 통해 배우다
 

그다음 실패는 어음이다. 1982년 울산의 모 상사에서 처음에는 현금을 주고 물건을 사가더니 어음으로 바뀌고 나중엔 점점 날짜가 길어졌다. 결국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다른 한 군데에서 또 어음부도가 터졌다. 밤새 뜬 눈으로 고민을 하다 구매처에 편지를 썼다. ‘1년만 유예를 해주십시오.’ 다행히 여기저기서 기다려주겠다는 분들이 나타났다. 그 감사를 갚으려고 더 이를 악물고 사업을 했다. 그 다음해는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간의 쌓은 탑이 한방에 무너질 수 있는 게 바로 이 세무조사였다. 당시 부가세가 안정이 안 되어 있었고, 세금계산서를 다 발행하고는 거래가 힘들 때였다. 사흘간 세무조사를 받으니 이대로 사업이 다 끝나는가 싶었다. 가까이만 보고 투명하지 않게 거래했던 대가는 참혹했다. 일곱 번째 실패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일들로써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어음부도를 겪으며 거래선의 신용도를 체크하는 일을 알게 됐고, 세무조사를 통해서 100% 계산서 발행원칙을 세워 투명경영으로 가게 됐다. 이 일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날 기업인으로 서지 못했을 것이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더 괜찮은 사업가로 성장하게 됐다.
그때 조양철공소에서 선반공 일만 잘 배웠다면 나는 단지 기술자로 나이를 먹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쫓겨나는 바람에 장사를 배우게 됐다. 미군부대 물건을 팔다 걸리는 바람에 부정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성적이 좋은 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내 나이 예순아홉에 이미 퇴직을 했지 이리 펄펄하게 사업을 하고 있을 리 없다. 그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시골에 있었다면 나는 대도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이사를 와서 경쟁이 치열한 벌판에 살아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실패가 주는 열매다.
 

실패 좀 해라!
 

직원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한다. ‘실패 좀 해라!’ 실패에 머물렀다면 난 오늘 이 글을 쓰지 못한다.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런 식으로 나아가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가 되는데, 그때는 이전의 실패가 실패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어떨 땐 성공의 재료가 되었다.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 실패를 실패로 끝내려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취업이며 경쟁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들었다. 실패해도 상처받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무던히도 일어서던 스무 살, 서른 살의 내가 있어 그나마 지금 나의 사업과 인생이 이만큼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툭 털고 일어나 다시 도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지금 힘들다면 그 자체를 과정으로, 목표를 위한 재료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