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발행인 칼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 힘든 시간들이 있다. 그땐 어떡해야 할까? 굴복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생도 사업도 거기가 끝이다. 그러나 뭐라도 방법을 찾아 몸부림치면 길은 열린다. 어떨 땐 예상보다 더 나은 길도 열린다.
1963년 고등학교 입학시험 사흘을 앞두고 골절사고를 당했다. 응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조양철공소로 갔고 선반공이 되는 과정을 밟았다. 3년이면 선반공 꿈을 이루는데 몇 개월을 앞두고 또 사고가 났다. 동료들의 폭행으로 열흘 넘게 병원에 입원했고 깨어나보니 모두 내 잘못이 돼있었다. 이렇게 억울해서야 살 수 있겠나 싶었다. 선반공의 꿈도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 친구분의 도움으로 이병철 회장의 삼성상회 국수공장 앞에서 공구노점상을 했다. 공구인생이 시작됐고, 그때가 1966년 4월 1일이었다.
고물장수, 엿장수들이 노점상에서 공구를 구입했다. 공구장사 시작 몇 개월도 안됐지만 장사가 제법 됐다. 철공소 경험이 큰 지식이 되었다. 중고로 구입한 공구가 장물이 되어 장사시작 8개월 만에 장물취득죄로 경찰단속에 걸렸다. 번 돈을 변호사비로 모두 쓰고야 풀려났다. 난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번엔 고철을 수집하던 이유복 씨(후일 경북전장 대표)가 내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었다. 고철수집상은 공구노점상보다 좋았다. 그 뒤에 버스에 공구를 팔고 고철을 받아오는 일로 이어져 꽤 돈을 벌기도 했다. 공구에서 농기구, 자동차부품 등으로 더 넓은 세계를 보았다. 이번엔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은 지독한 힘듦에서 더 좋은 세계로, 마치 누군가가 안내하듯 변곡점을 지나왔다.
1975년 대구의 옛 북부정류장 앞에서 책임기업사를 운영했다. 그런데 정류장이 옮겨가버렸다. 매출이 반으로 떨어져 고민을 많이 했다. 나중엔 새 북부정류장으로 따라갔지만 매출은 이전의 1/3도 되지 않았다.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자’는 생각에 닿았다. 북부정류장은 김천, 상주, 점촌, 문경, 예천, 영주, 안동, 의성 등으로 연결돼 있어 중간도매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아찔한 위기 덕분에 소매에서 도매로 업종을 전환하게 됐다. 만약 그때 북부 정류장 장사가 잘 됐다면 난 지금도 자그만 공구장사를 하며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위기가 나를 변화하게 했고 다른 길로 나아가게 했다.
1979년, 한국은 많이 변화하던 시기였고,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공구 없이는 공구상을 할 수 없었다. 미제물건을 부산으로 보냈는데 결국 관세법 위반으로 걸렸다. 책임기업사는 이제 망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공급해주지 않는 집들이 생겼다. 나는 유치장에서 기도와 성경으로 날을 보냈다. 처이모부가 변호사를 데려와 무혐의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지만, 이 일로 ‘모두가 미제물건을 취급해도 나만은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다. 이후 회사에서도 매일아침 기도와 찬송을 하게 됐다. 유치장에 들어갈 때는 ‘여기서 끝인가’했는데 헤쳐 나오니 회사를 어떻게 경영할지 분명한 기준이 보였다.
1997년, IMF를 심하게 겪었다. 무역이 중지되고 회사마당에서는 부도 난 상품들이 적재돼 있었다. 대출을 받다가 마지막 적금통장까지 해약을 했다. 직원들도 줄퇴사를 하고,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못다 한 공부나 하자’고 패기를 부렸다. 서울대 경영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에 들어갔고, 그때 공부한 것이 훗날 큰 도움이 됐다. 1999년도 회사가 어려울 때 입사한 직원들은 지금도 회사에서 가장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다. 크게 보고, 크게 저지르고, 크게 판단할 줄 아는 경영자로서의 그릇을 키웠다. 어떻게든 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몸부림치니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2018년 2월 1일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았다. 가슴을 열고 수술해야 돼 극심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살아왔던 날들이 영화처럼 지나가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7시간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이후 운동이나 출장 중에 다섯 번이나 쓰러졌다. 지금도 6년 5개월째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 수술을 받은 그해 6월말에 회사에 화재가 났다. 건물 한 동이 전소되고 물건도 타버렸다. 옆에 붙은 달성공원역사로 화재가 번지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그해 여름엔 국민청원에 회사이름이 올라왔다. 30년 넘게 해온 극기훈련에 대해 직원과 나의 시각이 달랐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18년과 2019년은 나에게 참 힘든 해였던 만큼 매출도 마이너스를 찍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직원들과 나는 연구와 개발에 몰두했다. 잘못된 것과 물새는 곳을 찾고 좋은 씨앗을 키우는 내부혁신을 실시했다. 이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매출도 회복되고 회사도 정상화되었다. 건강 역시 회복됐다. 마치 누가 나를 실험이라도 하듯 끝도 없는 어려움으로 몰아넣지만, 내가 열정을 부어 헤쳐나오려 노력하면 이전보다 더 나은 세상이 열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지금 힘드신가? 곧 다 부서질 것 같으신가? 어떻게든 헤쳐가려 몸부림치며 이것저것 뭐라도 해보면 다른 길이 열린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은 길도 열리더라는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어 오늘 이 글을 썼다. 옛말 하나 그른 것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발걸음조차 못 떼면 되겠는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찾아보면 해법이 보이고 길은 열릴 것이다. 구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어리석은 인간을 신은 외면하지 않는다. 내 일흔일곱 해 경험은 그랬다
글 _ 최영수 크레텍 대표이사, 발행인, 명예 경영학·공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