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발행인 칼럼] 잠자던 사자가 깨어났다
1994년 처음으로 중국 광저우 전시회에 갔다. 그때만 해도 홍콩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광저우로 가야했다. 당시 광저우는 공항 규모가 아주 작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다. 큰 건물은 거의 없었고 인력거꾼이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전시장에 들어가니 마치 시골장터 같았다. 제대로 된 진열대도 없이 바닥에 상품을 두고 프린트된 계산서로 가격을 매겨주었다. 이래 가지고 무역이 되겠나 했지만, 가격이 미국이나 일본의 1/3, 대만의 반도 안 될 정도로 쌌다. 국내에 제품을 들여와 봤지만 대부분이 샘플과 다르고 품질도 낮았다. 이러다 신용 다 잃겠다 싶어 중국제품은 그만둘까 고심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내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영기업을 민간으로 전환시키며 30-40대 초반 리더들이 경영을 맡았다. 생산성이 향상되고 품질개선이 이뤄졌으며 디자인변화가 나타났다. 2001년 12월 중국은 WTO(세계무역기구) 143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이동했던 옛 전시장이 2004년에는 크고 넓게 조성됐다. 처음 1개동에서 시작해 건물이 계속 확장되고 디스플레이(전시모습)도 훨씬 좋아졌다. 2000년대 초, 미국 유럽 등 많은 서구기업들이 중국에서 생산설비를 갖추고 OEM 생산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기술전수가 이루어졌으며 품질도 확연하게 개선됐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품질에서 밀리면 끝이다’라는 걸 중국도 알게 된 것 같았다.
2014년, 제품수준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데다 품질까지 뛰어난 정밀 고급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만 등에서 생산하던 중상급 제품들까지 중국 자체적으로 나왔다. 전에는 수량으로 승부했다면 이제는 품질로 겨뤄보자는 것 같았다. 중국에서 과연 생산이 가능할까 했던 에어공구도 프로수준이 됐다. 전동공구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유명 전동공구들은 사실상 브랜드만 붙였을 뿐 중국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가격을 맞추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동공구 생산 형국이 이렇게 되니 다른 공구브랜드들도 따라갔다.
지난 4월 15일부터 닷새간 중국 광저우 전시회를 방문했다. 코로나로 4년 만에 갔는데, 달라진 규모며 파워에 입이 떡 벌어졌다. 한국에서 아무리 뉴스와 신문을 통해 듣더라도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어떻게 표현할지 모를 정도로 중국의 성장과 규모에 놀라고 압도당하게 된다. 1994년과 비교해보면 규모면에서 10배 커졌다. 방문객은 무려 37만 명에 4월 15일 첫째 날 입장에만 2시간 넘게 걸렸다. 품질걱정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가 됐으며, 세계를 선도하는 품질은 물론 각 기업마다 많은 개선과 변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살아남는 종은 우수한 종도 아니고 강한 종도 아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 또한 기업을 경영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사람이지만 어떡하면 30년 만에 천지개벽할 수준의 산업발전을 이루는지, 무서울 정도라고 해야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30년 만의 속도와 변화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히, 내가 본 특징 중 말씀드리고 싶은 것 하나는, 유통기업의 활약이다. 제조사가 하는 제조에는 한계가 있지만 유통사는 그 범위를 얼마든지 넓혀갈 수 있다. 중국의 앞선 기업들은 미국 일본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유명브랜드를 사서 그 브랜드로 생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의 오래된 기업들은 판매처 관리는 물론 기술관리까지 직접 하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겠구나’ 직감했다.
1817년 나폴레옹은 중국을 잠자는 사자에 빗대어 ‘사자가 깨어나면 온 세상이 흔들릴 테니 깨우지 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을 대수롭지 않게 보거나 업신여기는 유럽인들에게 하는 경고기도 했다. 사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에 등장한 건 불과 몇 백 년 되지 않고 오래전에는 유럽이 중국의 문화와 기술을 배워갔다. 그만큼 중국의 잠재력은 무섭다. 그런데 이 중국이 이제 잠재력을 넘어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왔다. 깨어난 사자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사자가 깨어난 시대에 우리 공구인들은 무얼 해야 할까. 이번 광저우전시회를 보면서 나는 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화려한 전시장이 중국 전체의 모습은 아니다. 중국 안으로 들어가 전통적인 공구상가를 종종 방문한다. 아직은 열악하며 컴퓨터를 안쓰는 집이 허다하다. 중국 자체에서는 제대로 된 종합카탈로그가 없고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관리하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못하다. 한국에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공구유통기업들이 발전하고 있다. 카탈로그를 통해 공구제품의 정보에서 체계가 잡히고 시장유통 질서가 잡혀있다, 반면, 중국의 산업공구 전체는 앞서가지만 공구제품 관리력은 한국이 앞선다고 나는 봤다. 한국의 공구업계가 중국 공구시장의 변화에 주도권을 가질 수 없을까, 조심스런 생각을 해봤다.
80억 전세계 인구 중 14억이 중국인구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서 한국입장이 난처할 때가 많다. 그런데 공구유통에서는 한국이 잘하고 있으니 우리가 리드할 수 없을까? 우리나라 젊은 공구인들이 나의 상상을 세계무대에서 실현해주길 바란다. ‘왜 안돼? 해보기나 했어?’라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라’는 말이 있다. 깨어난 사자의 등에 올라탈 수 있는 방법, 지금의 한국공구인들에게 다가온 숙제이자 기회라고 나는 본다. 중국시장을 파악해 한국의 공구인들이 도전해보길 바라면서 이 글을 쓰니 부디 흘려듣지 말길 바란다.
글 _ 발행인·크레텍 대표이사 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