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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꿈의 크기


꿈의 크기


콤플렉스 벗어나기

“사람의 꿈은 그 크기만큼 자란다.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기준, 즉 자신이 성취하고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성장한다.” - 피터 드러커 -
 
나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졸업이 전부다. 언제나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해군에 입대해서도 중학 졸업자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마치자!’ 1970년 12월, 마지막 제대휴가를 받아서 서울 안국동의 한국학원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은 대학을 가기위해 밤새워 공부했고 나는 밤이면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낮엔 취직하러 다녔다. 무수하게 이력서를 냈지만 중졸학력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 본 것이 부산 영도에 있는 원양어선 간부 모집. 2년 6개월 교육과 실습을 하면 원양어선 간부가 되는 과정이었다. 다행히 합격은 했지만 집에서 반대했다.
“해군에 있을 때 매일 맘을 졸였는데, 또 배를 타고 사모아에 참치 잡으러 간다고?”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사정은 여전히 어려웠다. 전에 경험이 있던 공구장사를 시작했다. 자전거에 공구를 싣고 버스주차장에 가서 공구를 팔고 고철을 받아오는 공구행상이었다. 장사는 잘되었다. 1년 만에 당시 대구 원대주차장 앞에 조그만 가게를 냈다. 1971년 12월 14일, 책임보장공구사 문을 열었다.
 
최서방은 돈 떼먹지 않아요

1973년이 되었다. 환갑이 되신 아버지는 며느리가 해주는 밥을 드셔야한다며 나를 재촉하셨다. 대구매일신문에 광고를 냈다. “숯구이 검둥이 총각 바보온달에 아내 될 자는 이 땅에 없는가.” 시꺼먼 공구기름이 묻은 내 모습까지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색적인 결혼광고에 전화가 빗발쳤고 그 일로 한 스무 명 넘게 만났다. 하지만 인연이 되진 못했다. 
그러다 친구가 좋은 사람이 있다며 소개했다. 나가봤더니 어머니와 함께 온 참한 아가씨. 당사자인 아가씨보다 그 어머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아가씨는 나에게 마음이 없었는데 어머님께서 나를 적극 추천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린 결혼했다. 아내는 대학을 나왔다. 정말 평강공주와 온달의 결혼이었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아내를 호강시키지 못했다. 공구상 사장인 줄 알았더니 가게는 빚더미였고 시누 세 명에 툭하면 돈이나 꿔오라 하는 문제 많은 남편이었다. 아내는 첫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나의 학력이 중졸이라는 걸 알게 됐다. 크게 실망했을까. 아내의 대학졸업 사진 뒤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희망에 찼었는데… 꿈이 많았는데…’
어쨌든 아내는 내색 않고 가게에 나와서 뒷바라지 잘 해주었으며 덕분에 사업도 성장했다. 당시 공구업이 그렇듯 늘 돈이 부족했다. 아내는 돈도 잘 빌려왔다. 장모님께서 ‘최서방은 성실하니 돈 떼먹지는 않는다’며 여기저기 융통해주셨다. 물론 나 또한 이자도 잘 내고 떼먹지 않는 사위가 되려고 더 사업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사업은 커갔지만 나의 가슴 한켠에는 언제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나를 단련시킨 아내의 글

1986년 9월 대구대 사회개발대학원에 들어갔다. 목적은 나도 대학 모자 한번 써보자는 것이었는데, 하다 보니 전력으로 공부하게 됐다. 저녁에 배운 것은 다음날 장사에 실제 적용됐다. 공부에 재미가 났다. 이렇게 해서 영남대, 계명대, 경북대 등에서 공부했지만 영어와 한자실력이 부족해서 이해가 잘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영어선생을 우리집으로 매일아침 오게 해서 영어공부를 했다. 일 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23년이 걸렸다. 
1998년 IMF위기 때는 다들 사업이 어렵다지만 나는 서울대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에 가서 공부를 했다. 일주일에 2~3회 올라갔는데, 대구에 도착하면 새벽 2시가 넘었다. 부족한 학력을 채우려, 또 아내의 사진 뒤 ‘꿈이 많았는데’라는 문구를 새기며 나를 더 채찍질한 것이 내 공부 길의 원동력이 됐다.
이렇듯 ‘걸림돌을 디딤돌로’라는 슬로건은 내가 살아온 길이다. 공구유통업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시작할 당시 한국에서 공구유통업은 양지바른 업종이 되지 못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거나, 밀수, 둔갑, 장물 등이 많아서 장사가 좀 되려다가도 접어야했다. 너무 비하하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실제가 그러했다. 내 삶도 비슷했다. 선반공을 꿈꿨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철공소도 맘만큼 다니지 못했다. 모든 것이 걸림돌 투성이였음에도 이런 어려움을 공부의 과정으로 삼았다. 실패로 아팠지만 결국은 성공을 만드는 경영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꿈의 기준을 낮추지 마세요

혼란했던 시장에 제품 표준화와 가격 투명화, 유통 과학화를 이룬 것은 내 입으로 말하기보다 남이 인정해주는 사실이다. 공구업에서 많은 개선도 하고 혁신도 이루었다. 사회와 국가에 보탬이 된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내 나이 일흔하나. 이제는 사명감이라는 큰 숙제를 바라본다. 55년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업계와 사회를 위해 쓰고 싶다. 회사에 함께 고생해준 임직원들도 같이 잘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부족한 자신이기에 더 노력했으며, 환경이 좋지 못한 업계였기에 더 필사적으로 길을 찾았다. 돌아보면 꿈은 키워가는 것이다 싶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기준을 낮게 잡았다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 피터 드러커 -
 
오늘 걸림돌에 걸린 분들, 여기가 본인의 기준이 아님을 알고 딛고 일어서시길 바란다. 우리는 항상 높게 멀리 가야 한다. 우리업계도 마찬가지다. 꿈의 크기만큼 우리업계가 자란다고 생각한다. 힘들더라도 큰 꿈 꾸며 한발씩 이뤄가길 이 봄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