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를 깨닫다
불광대장간의 메질 수련 반세기
1500도 불가마 옆, 울려 퍼지는 쇠망치소리
탱-탱-탱-탱-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지하철 불광역에 내려 골목으로 접어들자 멀리서부터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와도 같은 그 맑은 소리가,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낯설 ‘대장간’이라는 단어를 벌써부터 짐작하게 만든다.
이른 아침부터 쇠망치 소리를 울리는 불광대장간은 아직도 손으로 단조 작업을 하는 대장간이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대장간 수는 고작 수십 개 남짓. 그 가운데 가마에 달군 쇠를 모루에 올려 망치로 때리는 단조 작업을 손으로 진행하는 대장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장일을 해 온 박경원 대장은 여전히 전통적인 단조 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래야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기 때문이라 말한다.
“요즘에 누가 직접 메질(망치질)해서 연장을 만들겠어. 다들 프레스로 찍어 내고 딸딸이 햄머(전동 단조기)로 때려 만들고 말지.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물건이 안 나와. 쇠를 불가마에 여러 차례 달구고 모루에 올려 때리고 해야 쇠질이 조밀조밀해 지면서 강도도 생기고 잘 안 망가지거든. 그래서 단조가 좋다는 거야.”
똑같은 밀가루로 짜장면을 만든다고 해도 기계로 면을 뽑은 짜장면과 손으로 쳐서 뽑은 것은 엄연한 면발의 차이가 느껴진다. 대장 작업도 그와 마찬가지다. 뻘겋게 달아오른 쇠를 여러 종류의 망치를 이용해 강하게 또는 살살, 그 정도를 조절해 가며 두들기는 작업이 있어야 진정한 철제 공구·연장이 탄생한다.
박 대장은 지금도 1,500도가 넘는 불가마 옆에서 쇠 두들기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고수 찾아 북서울 곳곳서 일… 제자 100명 배출
그가 대장간 일을 시작한 것은 열일곱 살 적의 일이다. 맨 처음 서울 돈암동 종점에 있던 대장간을 찾아가 5년 동안 일을 배웠고 그 다음은 미아리고개로 옮겨 또 5년을 배웠다. 그러고는 당시 세계에서 대장간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회자되던 을지로7가로 넘어가 대장 기술을 익혔다.
“대장간마다 그 대장간이 갖고 있는 기술이 있거든. 열 집 가면 열 집의 스타일이 다 다른데 5년 정도 일하면 그 기술을 몸에 익힐 수 있었어. 돈암동 대장간에서는 주인 양반이 일본 사람 밑에서 익혔던 열처리 기술을 배웠고 미아리에서는 또 다른 대장 기술을 배웠지. 그러다 보니 ‘아 여기서는 더 이상 배울 기술이 없겠구나’싶더라고. 그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곳곳의 대장 기술을 내 걸로 만든 거야.”
무협지의 고수가 곳곳의 문파를 찾아가 합을 겨뤄 상대의 무공을 흡수하듯, 그는 북서울 곳곳의 대장간에서 일하며 대장 기술을 몸으로 익혔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 ‘메질꾼’이 아닌, 진정한 ‘대장’의 모습을 갖춰 갔다. 을지로7가의 대장간에서 일을 할 때는 소문난 대장 실력에 그에게 대장일을 배우려 전라도며 경상도며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1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는데 마흔 살 먹은 사람도 가르치고 그랬어. 가르쳐서 내려 보내면 소문이 나서 또 오고 또 오고…. 그러다 보니까 이웃 대장간 주인들이 나를 자기 대장간으로 데려가려고 50만 원씩 싸들고 오고 그랬지. 50만 원이면 그 때 집 한 채 값이야.”
못 넓힌 게 아니라 안 넓힌 것
그 시기 대장일을 하고 받는 급료는 일당이 기본이었다. 남들보다 꽤 많은 일당을 받았지만 그래도 청춘. 돈을 모으는 것보다 쓰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던 나이였고,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보니 남의 대장간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벌이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독립해 리어카에 대장간을 차렸다. 난로 한 개와 풀무 한 개 그리고 사과 궤짝 하나를 싣고 다니던 초라한 대장간이었지만 실력은 변함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주문에 힘입어 작은 대장간을 차렸고 몇 차례 자리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불광대장간이라는 간판을 단 대장간을 열었다. 그게 벌써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박 대장의 실력처럼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대장간의 면적이다. 지금도 불광대장간은 고작해야 세 평 남짓에 불과하다.
“못 넓힌 게 아니라 안 넓힌 거야. 넓힐 필요가 없으니까. 무슨 대기업처럼 크게 공장 짓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건 파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내 기술을 알아봐 주는 기술자들 전문가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공구를 만들어 파는 것뿐이야. 그런데 굳이 크게 해서 만들 필요가 있겠어? 내 밑에서 일 배우던 친구 중에도 공장을 크게 했던 사람이 있었어. 보면 하루에 쇠가 열 톤씩 들어오고 그러더라고. 그 친구가 나한테 ‘형님도 좀 크게 해 보시죠’ 그러길래 ‘아유 나는 크게 안 해, 내 할 만큼만 할 거야’그랬지.”
하루 수백 개씩 공구를 찍어내던 공장들은 값싼 중국산 공구의 물결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은 전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전문가를 위한 품질과 내구도를 갖춘 공구를 만들어내는 불광대장간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십 년째 계속되는 망치질에 강철로 만들어진 모루가 세 번이나 교체됐다. 지금 사용하는 모루도 벌써 30년이 넘어 평평했던 상단면도 둥글게 닳았다. 모루의 연륜이다.
쟁이는 쟁이를 알아본다
빠루며 함마며 깎기, 메끼리라 불리는 벽돌 자르개, 낫이며 칼 등 전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주문제작 요청은 지금도 여전하다. 봄가을에는 한 달 100여건의 주문이 들어온다. 대부분 오래 된 단골손님들로부터의 주문이다. 집짓고 고치는 기술자들과 농사짓는 사람들. 멀게는 40년 전부터 불광대장간을 이용해 온 단골손님들은 서울만이 아닌 제주도, 김천, 안동, 원주, 홍천, 가평, 용인 등 전국에 퍼져 있다. 한 번 불광 공구를 경험한 손님들은 그 품질을 절대 잊지 못한다.
“지방에도 대장간이 한두 개쯤은 있을 텐데 그런 곳 제품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전문가들은 딱 보면 좋은지 안 좋은지 알거든. 그러니 가격은 비싸도 괜찮으니까 자기 마음에 드는 공구를 만들어 달라고 나한테 주문하는 거지.”
불광의 이름이 전국에 퍼진 건 입소문이 시작이었다. 작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불광 공구를 본 전문가들은 그 뛰어난 내구성과 품질을 한눈에 꿰뚫어 봤다. 어디 공구냐 묻는 질문의 대답으로 불광의 이름이 퍼진 것이다.
“문화재 많은 안동 같은 지역에서 한 번 공사를 하면 전국의 기술자들이 다 모이거든. 서울 석공들이 우리 연장 가져가서 일 하는 걸 보고 지방 석공들이 묻는 거야, 이걸 어디서 샀냐고. 그래도 경쟁자인데 쉽게 알려 주겠어? 그러니까 술을 한 번 사더래. 그래도 안 알려줘. 두 번을 샀대. 또 안 알려줘. 세 번을 사니까 서울 사람들도 미안한 거야. 우리 가게 명함을 주면서 그랬대, 우리는 여기서 연장을 산다고 여기서 구매하면 틀림없다고.”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내는 불광대장간 제품의 가격은 아무래도 좀 비쌀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단골들은 상관치 않는다. 불광 제품의 품질을 믿기 때문이다. 그처럼 인정받는 실력을 가진 전문가, 아니 장인(匠人)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불광대장간의 박경원 대장이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실력을 뽐내거나 고귀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낮춘다.
“우리는 오는 손님을 절대 설렁설렁 대하지 않아. 손님이 칼 갈아달라고 와도 숫돌에 일일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갈아서 주지. 다른 대장간은 아마 팔면 땡이지 칼이 들든지 말든지 신경 쓰는 곳 없을 거야.”
아들의 기술 인계… 근현대문화유산 지정
열일곱 살부터 나이 일흔 아홉인 지금까지, 반세기 하고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뜨거운 불가마 옆에서 쇠를 두들겨 온 박경원 대장. 그 시간동안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옆에서 휘두루는 메에 잘못 맞아 머리가 깨진 적도 있고 팔뚝에는 불똥이 튀어 만들어진 자잘한 흉터들이 가득이다. 상처라기보다 세월이 흔적이라 말하며 웃음을 짓는 대장이지만 곁에서 지켜봐 온 가족들에게는 그냥 보고 있기가 힘든 일이었다. 그것이 박경원 대장의 아들 박상범 씨가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된 이유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기본적으로 편한 일을 찾지 누가 힘든 일을 하고 싶어 하겠어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불 앞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봐 왔는데 선뜻 ‘하겠습니다’하는 말이 안 나오는 거죠. 일하는 직원 형님들도 힘드니까 자주 관둘 수밖에요. 그런데 제가 군대 제대하고 나서 보니까 일 해줄 사람이 없어서 어머니가 메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힘이 딸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거였죠. 그걸 보고 ‘안 되겠다. 내가 기술은 없더라도 몸이 튼튼하니까 사람 구할 때까지만 도와드려야겠다’했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죠. 하하하.”
성범씨가 아버지의 일을 도운지도 벌써 24년이 됐다. 맨 처음 같이 일하겠다고 했을 때 박 대장은 그렇게 기분좋을 수가 없었단다. 일손이 늘었다는 기쁨도 있겠지만 자신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대장 기술을 전수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기쁨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넘어 스승과 제자라는 수식어가 둘을 더 강하게 감싸고 있다.
2014년 근현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5년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된 불광대장간. 먼 미래에도 불광의 대장 기술이 우리의 전통 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기대한다.
글·사진 _ 이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