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CULTURE
[스토리 ‘그녀’] 보일러기능장 & 포항대 전기에너지과 교수 오서영
기술자를 동경하던 아이, 보일러를 만나다
“옛날에는 여자가 하는 일이 너무 구분돼 있었어요. 보일러 현장에는 여성이 없었죠. 저는 게다가 바짝 마르고 키가 작다보니 현장 아저씨들에게 아예 말도 못 붙이게 했어요.”
처음부터 보일러 일을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읜 그녀는 당장 혼자 힘으로 먹고 살기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70년대 당시 사회에 나와 처음 취직할 수 있었던 곳은 제조 공장이 대부분이었다. 봉제공장 3년, 신발공장 3년을 거쳐 섬유공장으로 입사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느 날, 인생을 바꿀 사건을 맞닥뜨린다.
“한 날은 공장에서 난리가 났어요. 섬유 염색을 할 때는 똑같은 온도가 유지돼야 일정한 색상이 입혀져 나와요. 그런데 그 온도유지 역할을 하는 보일러가 고장이 난 거예요. 스팀보일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색을 입혀도 나중엔 물이 빠져버리거든요.”
해외거래처의 수출 날짜를 맞추기 위해 회사에서 급히 보일러 기술자를 불렀다. 다행히 보일러는 반나절 만에 수리됐다. 바로 옆 부서인 경리과에서 기술자에게 일당을 줬다. 흰 봉투에 넣어준 돈은 1만2천원. 공장 월급의 3배였다.
“놀랐어요. 기술자가 되면 저렇게 많이 버는구나. 가정집이 연탄을 때던 시절에 보일러 기술은 엄청난 거였죠. 바로 이거다. 그날부로 저는 보일러 기술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전 뒤도 안 돌아보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왔어요. 정말 대책 없었죠.”
당시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주말에도 별을 보며 공장으로 출퇴근한 지 9년여. 우연일까 아님 운명이었을까, 20대 중반이 넘어 그녀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 된다. 어릴 적 기억에도 그녀는 기술자를 동경했다. 공사장에서 하얀 안전모를 쓰고 설계도를 돌돌 말아 팔에 끼고 다니던 사람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 꿈에 도전해보자. 그날부로 보일러 기술자가 되기 위해 무작정 기술을 배우고자 달려들었다. 여러 설비회사를 찾아다니며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첫 관문부터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무턱대고 가니 누가 반겨줘요. 가는 곳마다 ‘다친다, 가라’는 말만 들었어요. 당시 저는 힘도 없고, 나이에 비해 많이 어려 보여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여자가 뭘 해’ 5년 만에 무보수 취업해 공구 청소만
그렇게 3~4년 정도를 끈질기게 파고들었지만 배우는 것조차 허락해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열정은 그 누구보다 컸지만 시간은 허무하게만 흘러갔다. 당시 보일러 시공 작업은 지금보다 수작업이 많아 힘을 많이 필요로 했던 탓인지 보일러 학원에서도 여성은 받아주지 않았다. 공장에서 받은 퇴직금 몇 푼 외에는 먹고 살 돈도 없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참담함, 그 자체였다.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그냥 죽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받아주기만 하면 열심히 할 자신이 있는데.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아는 사람 한 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힘들게 굶고 산다는 게 소문이 났나 봐요. 제 손에 생활비를 조금 쥐어주면서 보일러 관리 쪽으로 공부해 자격증을 따보라 하시더라고요. 설비 쪽으로는 취직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열관리기사 자격증을 공부하기 위해 서점을 들러 수험서와 보일러 관련 서적들을 골랐다. 책을 사고 나오는 찰나, 이상하게도 다른 분야의 도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임마누엘 칸트의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칸트의 인생론을 쭉 읽어 내려갔다.
“칸트는 학창시절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나이 마흔에서야 이뤘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9년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도 끝까지 꿈을 안 놓았어요. 10년 뒤 처음 대학 강단에 설 때는 보수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실력 없이 보수를 받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찾아다니는 곳마다 무보수로 일을 하겠다고 설득했다. 받아줄 것만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여성취업의 벽은 높았고, 당시엔 보험개념도 없어 다치면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 손사래를 쳤다. 수많은 시도 끝에 다행히도 작은 보일러 설비회사에 무보수로 취직이 됐다. 맡은 일은 현장 투입이 아니라 청소담당이었다.
“사무실 청소, 공구통 청소만 했어요. 현장에서 기사들이 일하고 들어오면 공구마다 묻은 시멘트와 기름을 털어내고 걸레로 다 닦아내는 일이었어요. 다음날 그 공구들을 다시 꺼내 일하러 가야하니까.”
주변에서는 무보수로 청소만하는 그녀를 보고 ‘나이가 몇인데 저러느냐, 바보가 아니냐’고 손가락질을 했다. 서러웠다.
“제가 그 때 나이가 31살쯤 됐어요. ‘얼마나 모자라면 지금껏 월급도 안 받고 다닌대?’ 대놓고 무시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렸어요. 저한테 ‘야’라고 부르면서 일을 시키고. 막 대하는 거죠.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그들보다 더 나은 기술자가 되리라’… 그래서 결국 기술자가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한 지 8개월 째, 사장은 그 동안 고생 많았다며 5개월 치의 월급을 봉투에 넣어 줬다. 그러곤 다른 기사를 불러 그녀에게도 기술을 가르쳐주라고 지시했다. 5년여의 노력 끝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기회를 얻었다.
공구 용어 어려워 욕 많이 먹었죠
현장 일을 하면서는 월급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지만, 모르는 것투성이라 힘들었고 많이 혼나기도 했다.
“공구를 몰라서 어려웠어요. 지금은 사진 기술이 발달돼서 좋은 컬러사진이 많이 나와 있는데 옛날 책은 대부분 그림으로 그려져 있거나 사진이 있어도 흑백이라 제대로 구분이 불가능해요. 또 현장에 가면 아무도 표준어를 쓰지 않아요. 예전에 일을 하다가 한 기사가 ‘야, 뿌라야 가져와’ 그러는 거예요. 책을 아무리 봐도 그건 몰라요. 제가 어리둥절해 있는 걸 보고 그 기사가 ‘뿌라야 가져와! 병신 같은 게. 그걸 몰라?’ 그래요. 힘만 좋으면 철제 공구통을 다 들고 가는데 너무 무거우니까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당황했던 적이 있었어요. 다른 공구로 햄머 같은 경우에는 ‘함마, 함바’와 같은 발음을 해요. 그런데 건설현장에 있는 작은 식당도 ‘함바’라고 하거든요. 기사가 사투리로 ‘함마(바) 가아라’고 하니, 햄머를 가져오라는 건지 함바집에 가라는 건지 구분이 안 돼요. 우물쭈물 하고 있었는데, 다시 ‘식당가서 밥 무란 말이야’ 소리치시더라고요.(웃음)”
힘이 많이 들어가는 배관작업에 공구를 직접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기본적으로 보일러 공사에 들어가는 공구는 파이프렌치, 육각렌치세트, 몽키스패너, 동관작업을 위한 밴딩기 등이 있어요. 저는 산업용 파이프렌치 큰 거 하나를 들기엔 너무 무거워서 두 손으로 들고 공구 위에 올라타서 누르고 했어요. 힘이 모자라서. 큰 배관이 훨씬 나았죠. 용접작업을 하면 됐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지 않았다. 기술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장에서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익히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열관리학원에서도 문을 열어줘 기능사 자격증도 딸 수 있게 됐다. 그 후 보일러 기사, 기계특급기술, 품질관리 기술 등 8종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지와 성실함으로 무장, 기사 자격증을 따고나서는 다른 회사로 옮겨 현장 관리자로서 팀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든 현장 작업자들은 거칠었다. 공사판에서 오랜 세월 근무한 사람들을 관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노가다판에서 30년을 먹고살았다. 이제 기사인 주제에.”
맞는 걸 얘기해도 그들 방식대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지시에 따라주지 않아 서로 부딪힌 적도 많았다. 그래도 항상 그들에게 먼저 가서 두 손을 잡으며 깍듯하게 인사드렸다. 고맙다고 말했다. 일을 하면서 2001년에는 보일러기능장 자격증까지 땄다. 여성 최초였다.
여성 기술자가 인정받는 사회 꿈꾸며
“저는 현장에서 실무부터 익혔잖아요. 일을 하면서 나중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기술자 되기를 원했고, 어느 정도 경력이 갖춰지면 후배들에게 전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죠. 비록 시스템은 옛 것에 비해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일하는 사람과 현장의 감정은 아직 남아 있거든요.”
현재 포항대 전기에너지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스안전공학개론> 등 교재도 집필하고 있는 오서영 교수. 과대표인 김정윤 학생은 “교수님은 정이 많고 친근하게 대해주신다. 보일러, 위험물 관련 자격증 특강도 해주시고 방학 땐 공부하는 학생들 10~20명 정도 뽑아 무료특강도 열어주신다”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주시면 좋겠다”고 전했다.
2008년부터는 보일러 기술컨설팅회사인 (주)샤인이앤지를 창업하고 ‘축열식 폐열회수난방 시스템’과 ‘연소장치 밸브’ 등의 기술 특허도 취득한 바 있다. 행정안전부 신지식인 인증, 산업자원부 표창 수상에 이어 2012년부터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로 위촉돼 고등학생을 위한 일학습병행제와 대학 교육 프로그램 검토도 진행하고 있다.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빽빽한 스케줄에 잠도 부족하고 입 안이 헐지만, 그녀 인생의 마라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섬세함을 지닌 여성 기술자가 좀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저는 이렇게 말해요. ‘지금 누군가가 당신을 무시하고 존재를 알아주지 않아도 슬퍼하지 마라. 역으로 생각하면 여러분 성공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거다’ 긍정과 부정의 차이점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꿈을 갖고, 이왕이면 열정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인내를 가지면 나중엔 월계관을 쓸 수 있겠죠.”
글· 사진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