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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공구인 에세이]아버지에게 배운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아버지에게 배운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경기 안양 공생종합상사 정재영 대표

 

 

 

성실함으로 직원에서 대표까지 오르신 아버지

 

아버지는 전선회사 대표셨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계시다 회사 합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홀로 경기도 군포 지역으로 올라오셔서 신입직원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하셨고, 그 지역에서 가정을 차리고 누나와 나를 낳으셨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가 첫 취업을 하셨던 그 지역에서 30년 이상을 살았다.
아버지는 회사 내에서 성실하기로 1등이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셨다. 그때 당시에는 토요일까지 일했다고는 하나 중요한 건 아버지는 일상을 절대 벗어나지 않으셨고 매사에 열심히셨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말씀하셨던 적은 없었다. 우리가 크는 모습을 뒤에서 미소 지으며 지켜봐 주실 뿐이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꾸준하고 올곧은 사람이 아버지였다. 성실함의 보상인지 아버지의 직급은 점점 올라갔다. 언젠가부터 정 과장, 정 차장, 정 부장 이렇게 명함이 바뀌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한 자회사의 대표가 되셨다. 소나타III 법인차가 나왔으며, 회사에 가면 경비실 아저씨가 긴장한 표정으로 경례를 했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눈을 비비던 나를 데리고 잠깐 출근하셨는데 아들에게 그렇게 자랑을 하고 싶으셨나 보다. 명절이 되면 그렇게 집 앞에 고기세트가 많이 쌓여있었다. 명절날은 고기 많이 먹는 날, 1년 중 가장 기쁜 날이었다.

 

 

퇴직 후에도 매일 새벽 4시부터 공구상 운영


어느 날, 뭔가 집안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법인 차는 없어지고 흰색 트럭이 생기더니 아버지는 그 뒤에 무언가 가득 싣고 가셨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알았는데 그때 명예퇴직을 하셨다고 했다. 나와 누나가 고등학생일 때,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에 작게 공구업을 시작하셨다. 더 이상 명절은 기쁘지 않는 날이었다. 집 앞에 쌓여있었던 선물은 없어졌고, 오히려 아버지가 선물을 보내기 바쁘셨다. 냉장고에 고기가 있어도 거래처 것이기에 먹을 수가 없었다. 이제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이 되셨다. 아버지는 더욱 부지런해지셨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아버지들은 새벽 4시에 출근하는 줄 알았다. 오죽하면 유통 상가에서 가장 먼저 불을 켠 사람이 아버지셨다고. 학교가 끝나고 밤 10시에 돌아오면 거실에서 영수증을 정리하고 계셨다. 내가 성인이 되고 취업을 하며 아버지는 점점 왜소해지셨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불의의 사고로 내가 공구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 대신해… 공구업에 뛰어들다


서울의 스타트업 기획자로 근무하던 나는 퇴사한 다음날 43만 킬로 트럭을 끌고 공구 상가로 출근했다. 병상에서 아버지가 손수 적어주신 거래처 연락처, 공구 설명 자료, 전표 처리 등의 서류를 읽어가며 일을 익혀 나갔다. 답답하다는 거래처 사장님의 잔소리와 현장의 치열한 소음, 기술자들의 험한 대화 등 내가 적응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뭔가를 배우려면 일단 부딪혀보고 실수 속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어내야 했다. 월급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던 내가 가업의 무게를 견디는 건 꽤나 힘들었다. 아버지는 이런 나를 기다려주셨다. 다만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태도를 강조하셨다. 사실 아버지의 말에 그리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는 업무가 이제 비효율적이라 치부했던 탓이었다. 일이 능숙해지고 공구 생태계에 깊이 적셔지니 그걸 전문성이라 착각하고 머리가 커졌다. 내가 개혁자인 마냥 공구업계의 생태계를 부조리하다 지적했고 결국 아버지의 태도를 부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몸과 시간만 갈아 넣었다가 노년에 몸이 불편해지지, 하는 못된 뒷담도 있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업에 반발하여 따로 사업자를 만들게 되었다. 앞으로 공구업계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출사표를 던진 것이자, 내 말이 옳다는 증명을 하기 위함이었다.

 

내 방식에 자신만만했지만… 결국 중요한건 ‘성실’과 ‘정직’


영업을 한다는 빌미로 출근 시간도 들쑥날쑥하며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전 직장과 관련된 스타트업계의 사람을 만나니 나도 투자 받고 성공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SNS에는 멋져 보이는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자랑했다. 소위 ‘경제적 자유’를 외치며 내가 그 당사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 뒤 사업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오래 단단히 관계를 쌓아 올렸던 거래처가 떠나갔고, 내가 구상하던 사업 아이템들도 줄줄이 실패로 결정되었다.
어떤 것부터 잘못되었을까? 곧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나 강조하시던 태도가 모든 문제임을 알았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어쨌든 아버지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수용했다. 매일 5시에 일어나 사무실에 출근하고, 수행해야 될 업무들을 정하며 지켰다. 떠나간 거래처에는 다시 한 번 연락하여 성실한 납품을 약속했다. 찾아오는 고객은 백년손님처럼 친절히 맞이했다. 그 후 다행히 어느 정도 균열이 갔던 거래를 회복하였고 알아서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의 사업 방향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서서히 성장의 태엽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크게 깨달았다. 업에는 올바른 태도가 기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윗세대 방식도 들어보며 현재와 새로움 받아들여야


젊은 공구인이 많아지고 있다. 나처럼 의도치 않게 물려받거나, 공구의 잠재성을 보고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 그런지 업계에는 새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온라인 커머스 시장은 팽창하고, 그 커머스의 방식마저 진화한다. 유튜브에는 공구 콘텐츠가 넘쳐난다. 공구는 생활 용품, 캠핑 용품까지 시세를 확장한다. 공구 박람회가 서울의 중심에서 열리기도 한다. 이제 공구는 공구 상가에만 있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일상에 머무르며 자신의 전문성과 공구를 결합한다면 누구나 새로운 기회를 엿볼 수 있다. 공구라는 이 유니버스는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럴수록 태도는 더 단단해져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체득할수록 나의 태도가 변질되진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특히, 업계에 오래 계신 윗세대, 선배님들의 방식을 들어봐야 한다. 내 아버지처럼 성실함과 정직함일 수도, 고객에게 친절하거나 회사에 오너십을 가지는 등 다양한 태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태도로 일의 철학, 회사의 비전을 정립하면 거친 풍파에도 쓰러지지 않고 일단은 버텨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아버지와 같은 우리 윗세대가 지금도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십 년째 변하지 않는 태도로 업을 이어 오며 가정을 이끌고 직원의 삶을 책임져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2024년은 더욱 힘들 거라고 얘기한다. 누군가는 몸을 웅크려 생존에 집착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투자와 전략을 통해 전화위복을 노릴 것이다. 뭐든 좋은 생각이다. 다만, 우리의 태도가 올바른지, 변하지 않았는지를 다시 점검해 보는 게 좋겠다. 나를 키워 오신 부모님, 그리고 이 생태계를 이끌어온 윗세대의 삶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사)한국산업용재협회와 한국기계공구가 주최한 산업용재인 수필 공모전 작품집. 공구업계에 종사하며 겪은 에피소드와 이를 통해 얻은 의미 있는 교훈과 깨달음, 삶의 성찰을 주제로 했다. (문의: 협회 사무국 02-2278-7740)

 

출처 _ <제1회 산업용재 수필문학상> 응모 작품집 / 진행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