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CULTURE
[공구인 에세이] 힘들어서 좋았다! - 대구 신일볼트 조아라 대표
나는 내가 볼트 일을 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어른들이 첫 직장이 중요하다 하시는 말씀은 보통 본인이 익숙하고 잘하는 분야를 찾게 되어 첫 직장에서의 경험이 경력이 되고 연봉도 오르기 때문인데…, 난 대학을 휴학하고 근무하게 된 첫 직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어 경력을 쌓기는커녕 발목이 잡혔다!
대학에서 언어를 전공하였지만 성악을 배우고 싶다는 꿈으로 이탈리아어 교환학생으로 가서 사립음악원에서 성악을 배우기도 했다. 연애를 하면서도 남편과는 다른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다니던 대학의 조교로 근무하며 구직활동을 할 때 입사하고 싶었던 곳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니, 모시던 학장님이 말씀해 주셨다.
“아라야, 원래 제일 좋은 직장은 부모님이 하시던 사업체를 물려받거나 남편이 사업을 하면 그 일을 같이하는 게 좋은 거란다. 어떤 직장이든 받는 월급보다 훨씬 값어치 있게 일해야 되는데 그게 내 부모 일이고 내 남편 일이면 그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니?”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나는 어떤 직장에 가든 일을 잘해서 회사에 큰 보탬이 될 자신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왕이면 개업을 준비하고 있는 남편 일에 내가 보탬이 된다면 금상첨화구나 싶었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당시 결혼 준비를 하고 있던 예비 남편에게 나의 합류 소식을 전했다. 고맙게도 남편은 크게 환영했다. 원래 시동생을 데리고 시작하려던 사업이었는데, 나의 합류로 셋이서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한 남편은 말 그대로 투지가 넘쳤고, 형 가게에서 가족끼리 화기애애한 회사생활을 기대한 시동생과 대학 졸업을 하고 조교 생활만 해본 나는 회사 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걱정도 없이 그저 즐거웠다. 대구 성서공단 철물 시장 안에 가게를 계약했고, ‘신일볼트’라는 이름도 정하고,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바로 가게 공사를 시작했다. 가게 공사는 친정아버지 친구이신 김 사장 아저씨께서 해주셨는데,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하는 우리가 기특하다며 최선을 다해 주셨고 그 덕에 튼튼하고 우리 용도에 맞는 가게 인테리어가 완성되었다. 그 인연이 계속되어 가게를 확장하게 되었을 때 김 사장 아저씨가 또 공사를 맡아주셨고 지금도 가게의 손볼 일이 있으면 늘 김 사장 아저씨가 두말없이 달려와 주신다. 김 사장 아저씨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맺게 된 감사한 인연이었다.
그렇게 가게 공사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으로 볼트를 넣기 시작했는데, 수천 포의 마대를 끌고 가서 사이즈별로 부어놓고 올리고 쌓는 일이 얼마나 힘들던지 ‘난 어떤 일을 해도 잘할 거야.’라며 가볍게 생각하고 일을 같이한다고 했나 살짝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직장도 안 구하고 신일볼트에서 일하겠다 했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던 남편을 생각하면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이를 꽉 물고 볼트 마대를 들어 올렸고 볼트 다이를 밟고 올라가 꼭대기까지 마대 안의 볼트를 부어 꽉꽉 채워 넣었다. 볼트를 넣는 일만 근 한 달이 꼬박 걸렸다. 그렇게 힘든 신일볼트 만들기가 서서히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몸이 힘든 게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석 달 만에 정식 개업을 하게 되었다. 개업 초반에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목을 길게 빼고 가게 문만 바라보았고, 아직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신일볼트를 손님들도 못 미더운 듯 밖에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냥 가기 일쑤였다. 그나마 용기를 낸 손님이 들어왔을 때 찾는 품목이 어디 있는지 몰라 헤매고 있으니 성질 급한 손님은 그냥 가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가족경영! 가족이니까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줄 것 같지만 가족이라 더 힘든 가족경영! 예를 들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십 년 경력자이자, 정신없이 바쁜 직장에 익숙하던 남편은 가게 문만 열면 손님들을 줄을 세우며 장사할 줄 알았는데 손님들은 처음 문을 연 신일볼트를 애송이 취급했고, 이에 자존심이 상한 남편의 인상은 펴질 리 없었고, 이로 인해 인상만 쓰는 형을 보니, 화기애애한 직장을 꿈꾸던 시동생의 불만은 불만대로 커졌다. 거기다 이제 갓 결혼한 새색시이자 직장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던 나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남편의 잦은 술자리가 너무나 불만이었다. 1번 남편, 2번 나, 3번 시동생이라 치면 1번, 2번이 싸우고 그 와중에 1번, 3번이 또 싸우고 또 그사이에 중재하던 2번이 3번과 싸우는 등등 개업 초반에 서로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나게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그야말로 감정적으로 폭풍의 계절이었다. 가족경영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적응을 하고 나니 드디어 못 미더워하시는 것 같던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만다행) 나는 너무나 친절할 자신이 있었고 고객 만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를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고난이 왔다. 그것은 바로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었다. 말귀를 알아들어야 판매를 할 수 있는데 도무지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단어들을 나열하시는 손님들! (예를 들어, 가세야마 → 가는 나사) 도대체 왜 한 가지 제품을 두고 부르는 말이 이렇게 다양한 것인가? 사전에 나오는 말도 아니요, 컴퓨터로 검색되지도 않았다. 아니 요즘같이 바쁜 시대에 한 가지 말로 통일해서 서로 빠르게 볼일을 봐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손님들은 각자 분야마다 자기들의 고집이 있는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우리로서는 알아들어야 팔 수 있었다.
“볼트 팔면서 이것도 몰라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친절한 얼굴로 “어디에 쓰는 제품일까요?”라고 되물어가면서, 생긴 모양, 색깔을 확인해서 비슷해 보이는 곳으로 손님을 모시고 가서 직접 함께 찾으며 눈치코치로 팔았다. 아, 장사하기 힘들다!
그렇게 좌충우돌 신일볼트와 함께한 세월이 벌써 16년 차다. 신랑과 함께 일하던 시동생은 어엿한 사장님이 되어 근처에서 볼트 가게를 운영 중이고, 가족경영의 일환으로 내 동생, 시누이까지 함께 일하던 때도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볼트 판매도 가족경영도… 하지만 어느 책의 제목처럼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그 힘든 여정 중 김 사장 아저씨처럼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고, 가족경영으로 가족 간의 불화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뛰어넘는 끈끈한 가족애로 똘똘 뭉친다. 신일볼트에서의 세월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켜 지금은 나의 소중한 매일을 지켜내는 일상이 되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신일볼트에서의 나의 활약을 기대한다.
출처 _ <제1회 산업용재 수필문학상> 응모 작품집 / 진행 _ 장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