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겨울에 만나는 봄기운 여수 거문도 불탄봉

겨울과 봄이 맞닿아 있는 섬, 거문도
겨울에 꽃이 핀다. 설국의 눈꽃, 서리꽃이 아니다. 삭풍에 꽃을 피우고 훈풍에 꽃을 떨구는 동백. 동장군의 위세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 스러질 때도 싱싱한 꽃송이를 통째로 뚝, 떨어뜨리는 꽃. 그래서 동백의 아름다움엔 비장함이 잔뜩 묻어난다.
붉은 동백꽃이 오래된 사연을 들려주는 거문도엔 겨울이 없다. 아니 거문도의 겨울과 봄은 사이좋은 연인처럼 늘 붙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에도 봄을 만나러 거문도로 간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이생진 시인은 거문도도 지극히 사랑했다. 거문도를 찾는 나그네는 아름다운 자연, 의로운 인물, 질곡의 역사를 노래한 선생의 시집 <거문도>를 거문도행 뱃전에서 펼치고 이 섬의 매력에 빠져든다. 시인은 이 책에서 ‘거문도의 동백숲에는 안개처럼 자욱한 시가 있다’면서 거문도에 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말하지만, 거문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은 다름 아닌 바로 동백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불탄봉 오르는 길 … 밀림처럼 우거진 빽빽한 동백숲
거문도는 동백의 섬이다. 동백, 풍란, 후박나무 등 360여 종의 다양한 아열대 전체 수종 중 약 70%가 동백이다. 특히 서도의 불탄봉(195m)은 동백림 면적이 아주 넓다.
‘불이 자주 난다’는 불탄봉 오르는 길은 온통 동백숲이다. 그냥 동백숲이 아니라 수십,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밀림이다. 동백숲으로 사이로 이어진 산길은 동백의 진녹색 이파리로 뒤덮여 어두컴컴하지만 숨바꼭질하듯 피어난 동백 꽃송이들의 미소는 화사하다. 대부분 붉은 동백이지만 이따금 분홍 동백도 눈에 띈다. 숲 어디에선가 귀하다는 흰 동백도 미소를 보내고 있으리라.
일제강점기 때 설치한 지하 벙커가 남아 있는 정상에서 거문도를 조망한다. 고도(古島), 동도(東島), 서도(西島) 이렇게 세 개의 섬이 둘러싼 도내만(島內灣)은 먼 바다답지 않게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다. 거센 파도도 섬들을 넘지 못한다. 이토록 먼 바다에 어찌 저토록 명경지수 같은 바다가 있단 말인가. 조선 말기에 제국주의 열강들이 이 거문도를 동북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군침을 흘렸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누런 억새밭과 쪽빛 바다 … 수선화 맑은 향의 운치
불탄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널따란 억새밭이 나온다. 거센 해풍에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누런 억새 너머로 녹색의 동백숲이 다시 펼쳐진다. 아래로는 쪽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산길 옆엔 어여쁜 수선화 몇 송이 핀 작은 무덤이다. 평생을 거문도 거센 파도와 맞서던 거문도 어부의 무덤일까, 아니면 폭풍에 돌아오지 못하는 지아비를 기다리다 숨진 섬 아낙일까. 그래도 저 쪽빛 바다에서 강인하게 살다가 종내는 그 파도를 굽어보며 잠든 이는 행복할 것만 같다. 바람 센 무덤가 언덕에서도 꿋꿋한 수선화의 맑은 향내가 몸속으로 스며든다.
산길은 다시 동백숲으로 이어진다. 그 동백 그늘에서 해안 쪽으로 잠깐 빠지면 조망 빼어난 바윗덩이가 나온다. 바위를 부여잡고 내려가 잠시 조망을 즐긴다. 쪽빛 바다에서 달려드는 파도 물결은 바위에 부딪혀 새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동백숲 아니면 바다, 바다 아니면 동백숲이니 이래도 저래도 행복한 마음,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신선바위 조망에 감탄 … 보로봉 정상까지 아름다운 동백터널
유림해변 갈림길 지나면 왼쪽으론 동백숲, 오른쪽으론 아슬아슬한 해안 절벽을 동시에 끼고 간다. 저 아래를 보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까마득하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기와집 몰랑’이라 한다. ‘몰랑’이란 ‘산마루’란 뜻의 전라도 방언으로 ‘기와집 용마루 닮은 산마루’란 뜻이다. ‘거문도의 지붕’에 올라선 셈이다. 그 지붕 위엔 붉은 동백꽃이 가득하다. 떨어진 꽃송이가 밟힐까 발길이 조심스럽다.
해안에 우뚝 솟은 신선바위에 조심스레 오르면 누만 년 간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을 막아 온 남성미 넘치는 거문도 해벽 너머로 저 멀리 새하얀 거문도 등대가 선명하다. 그야말로 신선만이 누릴 수 있는 조망이 아닌가. 신선바위부터 보로봉 정상까지도 ‘동백터널’이다. 송이송이 알알이 붉은 동백에 눈이 시리다. 어쩌면 이토록 처연할까. 해운대 동백섬, 여수 오동도…. 우리나라에 많은 동백숲이 있지만 이곳 거문도 동백숲을 거닐지 않고 동백을 보았다 얘기할 수 없을 성싶다.
등대 가는 길 동백꽃 절정 … 떨어진 꽃이 붉은 양탄자 되어
보로봉 내려서면 나오는 목넘이(무넘이)는 ‘파도가 센 날이면 바닷물이 넘나든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거문도 섬소년들은 파도가 내뱉은 소금기 흔적이 역력한 저 갯바위들에서 세상 걱정 없이 뛰어 놀았을 것이다. 일렁이는 파도 사이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거문도 등대까지는 아름다운 산책로다. 떨어진 동백꽃이 붉은 양탄자처럼 펼쳐진 동백터널은 등대 가는 길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유명한 통영의 소매물도 등대는 보는 맛이 으뜸이고, 거문도 등대는 가는 맛이 일품이다.
이따금 터진 하늘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동박새와 직박구리 노랫소리도 청정하다. 그 옛날의 등대지기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도 21세기의 나그네들처럼 가슴 뿌듯한 행복감을 누렸을까. 이생진 시인은 거문도 등대로 가는 이 발품을 천국에서 걷는 걸음이라며 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고 노래했다.
15초마다 한 바퀴씩 돌면서 다도해 오가는 고깃배와 화물선의 안전을 책임지는 거문도 등대는 1905년 첫 불을 밝힌 남해안 최초의 근대식 등대다. 여기엔 나라의 안위가 처참하게 쓰러져 가던 그 시절 제국주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으나, 한 세기 동안 해상을 밝혔던 옛 등대는 뒷전으로 물러나 유물로 보존되고, 지금은 새 등대가 불을 밝히고 있다.
등대 전망대도 좋고, 그 아래 관백정(觀白亭)도 괜찮다. 거문도 등대에선 등대처럼 사방을 둘러보자. 그러면 동쪽으론 옥황상제의 왕자 일행이 변한 거라는 신비의 바위섬 백도(白島)가 아련하고, 남쪽으론 옅은 해무 속에 숨어 있는 한라산이 새하얀 이마를 내보일지도 모를 테니.

<주변 볼거리>
여수항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거문도는 다도해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으로 고도, 동도, 서도를 합친 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엔 삼도, 삼산도, 거마도 등으로도 불렸으나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해 거문도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거문도는 제주해협을 거쳐 대한해협을 잇는 해로의 중간에 있어 동북아 바다에서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더군다나 천연적으로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된 도내해(島內海)는 항구에 적합하다. 19세기 중엽, 동북아에 눈독을 들이던 제국주의 열강들은 거문도의 이러한 장점에 주목했다. 1845년 영국 함대는 거문도를 샅샅이 조사한 뒤 동북아를 공략할 때 해군기지로 알맞다고 여겼다. 이때 지어진 이름이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결국 1885년 영국군은 군함 6척과 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무려 22개월
이나 무단 점거했다. 그것이 바로 ‘거문도 사건’이다. 당시 영국의 명분은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응한다는 것이었으나, 목적은 동북아에 거점을 확보하려는 야욕의 하나였던 것이다.
‘거문도 사건’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도의 거문초등학교는 영국군 수병 막사 자리다. 그 뒤쪽 산기슭엔 당시 사망한 영국군 수병의 묘가 남아 있다. 침략군의 흔적이지만 묘지 가는 길은 예쁜 산책로다. 요즘엔 거문도의 북단의 녹산 등대를 찾는 이도 조금 늘었다.
거문도 등대가 섬의 남쪽을 밝힌다면, 무인인 녹산등대는 북쪽을 책임진다. 마치 제주도의 섭지코지를 연상케하는 길에 거문도 인어 조형물이 서있는 인어해양공원을 만난다. ‘신지끼’라 불리는 거문도 인어는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나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어 어부들을 태풍으로부터 구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킬로미터 떨어진 백도국가명승지 제7호는 모두 3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무인도다. 백도엔 희귀 난이 많이 자라는데 향이 너무 진해서 옛날 어부들은 짙은 해무가 드리워지면 백도를 등대 삼아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상백도엔 태양열 무인 등대가 있어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보호구역이라 섬에 상륙할 수 없고, 유람선을 타면 왕관바위, 물개바위, 시루떡바위, 서방바위, 각시바위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맛집>
거문도는 갈치 요리가 별미다. 삼도식당(061.665.5946), 섬마을식당(061.666.8111) 등에서 자연산 갈치 요리를 차린다. 자연산 갈치회 3~5만원, 갈치조림 1인분 1만 2,000원. 우럭, 돔 등 활어회도 차린다. 겨울엔 거문도 삼치가 별미다. 바닷바람이 키운 해풍쑥도 이즈음에 구입할 수 있다.
<여행 팁>
01 여수~거문도와 백도유람선 배편은 기상 등에 따라 입출항 시간이 변하거나 취소될 수 있으므로 미리 전화로 확인해야 한다.
02 숙박시설과 음식점, 가게 등 편의시설은 모두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고도에 몰려 있고, 거문도등대, 불탄봉, 녹산등대 등 볼거리는 대부분 서도에 있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돼 있다. 동도는 서도선착장에서 도선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03 거문도엔 택시(9인용 승합차)가 2대 있다. 여객선터미널 앞에서 거문도등대 가는 길 입구까지 편도 1인 8,000원, 녹산등대 가는 길 입구까지 1만 5,000원. 거문도 콜택시(061.665.1681).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볼 수도 있다. 1시간 4,000원, 1일 2만원.
04 거문도항 식당은 보통 아침 8시 30분에 영업을 시작하므로 매식할 땐 일정을 염두에 둬야 한다.
05 여수시청 대표전화(1899.2012), 삼산면사무소(061.690.2607).
